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101화 (101/200)

00101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욘느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눈앞의 이상한 녀석과 평생을 함께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참에 자기를 남작가와 정략혼을 시키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비욘느는 에린이 싫었다.

“저는 강한 사람이 좋아요!”

어린애답지 않게 눈에 힘을 주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고 크레이머 남작의 눈알이 빠르게 돌아갔다.

항상 구박만 해댄 아들에게 시선을 준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린 크레이머의 검술 실력은 꽤 좋은 편이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칭찬을 아끼고 혼을 내는 것이지 저맘때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엄지를 치켜들어도 모자라다.

소년일 뿐인 아이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한창 실력 발휘를 하는 기사들과 같은 수준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훈련에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오는 아들 녀석을 바라보면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브라우닝 자작의 영애가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면 이참에 에린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모든 것이 확실히 진다.

분명 브라우닝 자작도 흡족해 하겠지.

그렇게만 되면 그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브라우닝 영지의 경제력과 크레이머 영지의 군사력이 함께한다면 이 일대에서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지금 같은 수준의 기사단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들였던 노력을 생각하면 이번 일은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남자는 강해야 하오! 브라우닝 영애는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남자보는 눈이 훌륭하니 장차 브라우닝 영지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겠소. 하하하! 어떻습니까? 자작님. 제 아들의 검술 실력이 꽤 칭찬할만하니 이참에 그 실력을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아비 되는 입장에서 너무 자랑하는 건 좋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이 녀석이 자기 나이 때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하하하!”

크레이머 남작은 이참에 자기의 내심을 솔직하게 말한 셈이지만 듣는 에린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우선 아버지께서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자신을 다른 귀족 앞에서 칭찬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힌 채 아버지를 살폈다.

아버지께서 지금 진심이실까? 아니면 그만큼 영지의 사정이 어려워 거짓말까지 하시며 영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시는 걸까?

모르겠구나.

하지만 만약 아버지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지금 그 말은 자신이 기억하기론 거의 처음 듣는 아버지의 칭찬이었으니 말이다.

에린은 감정을 어떻게든 조절하려고 애썼다.

잘못했다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창피도 그런 창피가 없다.

혹 아버지의 말씀이 진심이었더라도 그가 눈물을 보임으로서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리고 말리라.

그는 테이블 아래 있는 왼손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주먹에 감각이 사라질 정도였다.

에린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저 버릇없는 계집애는 정말 너무하는구나.

자기는 검조차 제대로 쥘 줄 모르면서 열심히 노력한 나를 비웃겠다는 심산이겠지.

계집애의 삶이란 해봤자 자수나 놓으며 어영부영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전부일 텐데 어떻게 한 사람이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것을 부정하려 한단 말인가?

저 계집애가 하고자 하는 말은 너무도 명확하다.

내 실력이 별것 없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게 해서 창피를 주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대로 네 뜻대로 되진 않을 테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곧기만 하시던 아버지께서 어쩌면 거짓말까지 하시며 지키시려는 영지를 내가 못나서 무너뜨릴 수는 없다.

어린데도 저렇게 심성이 나쁜 너와는 결혼하기 싫지만 그래도 이것이 영지를 위한 길이라면 내 감정은 무시하고라도 너와 결혼을 해야겠다.

브라우닝 자작도 이참에 이야기를 있는 대로 진행시키고 싶었다.

지금만 해도 두 손 두 발 들게 생긴 딸아이가 커서는 얼마나 더 일을 저지르고 다닐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런 상상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성장하게 된다면 마구간지기와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혹 그런 최악의 상황만은 피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천방지축 성격이라면 그런 성격을 받아줄 나이 지긋한 연배의 귀족을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브라우닝 자작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내에게 딸아이를 시집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 봐도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크레이머 남작가의 사내들이 실력이 좋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딸아이는 평소에도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매일 졸라댔으니 에린 크레이머가 남작의 말대로 꽤 실력이 있다면 분명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사천리이지 않을까?

지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굳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딸아이가 시집을 보내달라고 할 것 임에 틀림없다.

“꼭 보고 싶군. 크레이머 남작의 아들이 약할 리 없지. 남작이 허튼 소리나 하는 자가 아니라는 건 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야. 오늘은 늦었으니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훈련장에서 그 뛰어난 실력을 보았으면 좋겠군. 물론, 남작이 괜찮다면 말이지만...”

자작이 살며시 의향을 묻자 크레이머 남작은 흥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반대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하하!”

“잘되었군. 정말 잘 되었어!”

자작과 남작이 서로 의기투합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자 이미 막을 자는 없어 보였다.

에린 크레이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계집아이와 평생 함께 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가슴이 쓰렸지만 오늘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자랑스러워할만한 아들이 된 것 같아 조금은 뿌듯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뭐든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일말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사내들의 웃음은 곧 그칠 수밖에 없었다.

비욘느가 단호하고도 건방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에린 크레이머 공자가 강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강한 건가요?”

한창 무르익던 훈훈한 분위기가 조금 삐걱거리게 되자 브라우닝 자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야 제이미 경과 검을 섞어보면 알지 않겠느냐? 제이미 경이 허투루 평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비욘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건 싫어요. 에린 공자가 제이미 경을 이길 수 있겠어요? 분명 지겠죠. 그렇게 되면 자기 나이 때에서는 강하다는 말로 치하하며 넘어갈 뿐이죠. 제이미 경이라면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그 실력이 진짜 좋은지 아니면 형편없는지 알 수가 없어요.”

자작은 당돌한 말을 꺼내는 비욘느를 혼내려 했지만 그 전에 크레이머 남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영애는 어떻게 실력을 증명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내게도 알려주었으면 좋겠군.”

그제야 비욘느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요. 저는 꽤 실력 좋은 아이를 아는데 에린 공자보다는 좀 어려요. 그래도 실력은 정말 괜찮죠. 그 아이를 에린 공자가 이긴다면 정말 또래에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실력이라고 믿어도 좋아요. 그때에는 에린 크레이머 공자에게 시집가겠어요. 공자는 정말 강한 사람이라고 제게 증명한 셈이 되니까요. 하지만 만약 지게 된다면 에린 공자의 실력을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제 평생을 의탁할 수는 없죠.”

에린 크레이머는 순간 비욘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크레이머 남작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영애가 그걸 바란다면 거기에 따라야겠지.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영애가 안다는 그 아이는 확실히 에린보단 어린 거겠지? 아무래도 현역 기사를 아는 아이라고 데려오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으니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군.”

“그 점은 걱정 마세요. 직접 보고 크레이머 남작님이 수긍할 수 없다면 고집부리지 않을 테니까요.”

“하하! 좋아!”

“그렇지만 그 아이를 만나는 건 이틀 뒤라서 내일은 아무래도 안돼요. 그러니까 내일은 예정대로 제이미경에게 조금 지도받는 편이 좋겠어요.”

“그것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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