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3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이거 맛있지?”
로드리고가 낸시에게 물었다.
“그냥 그래요.”
낸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로드리고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여간 사줘도 이렇다니까. 어제 돌아다니다가 괜찮은 곳이 있어서 데려와줬더니 말이야. 그냥 좀 맛있다고 하면 안 되냐?”
“...맛있어요.”
“아우우우~~~! 됐다, 됐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완전 엎드려서 절 받기 아니야?”
“진짜... 맛있어요.”
“그럼 왜 그냥 그렇다고 말했는데?”
“...몰라요. 그런 거...”
“너 암튼 이상해. 그런 태도 고쳐야 한다고. 알아?”
“내버려 두세요. 저는 답답한 거 없으니까.”
“내가 답답해서 그런 거야! 윗사람이 그러라고 하면 너 같은 애는 그냥 ‘예에~! 도련님! 그렇게 할게요.’하고 고치면 되는 거거든.”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낸시가 말했다.
“누가 윗사람인데요?”
“뭐?! 당연히 나지! 지금까지 뭐 들은 거야?!”
“제 윗사람은 주인님과 마님이죠. 도련님은 아니에요.”
“그건 아니지! 너 아주 알량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러다 나한테 혼난다?”
“누가 혼날까 봐요?”
“기가 센 여자는 남자들이 전부 싫어하는 법이야. 내가 어제 좀 만났던 여자는 너랑은 다르게 아주 사근사근했는데...”
낸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딱히 로드리고가 누구를 만나던 상관은 없지만 자기와 누군가를 비교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그럼 그 여자 불러서 식사하세요. 저는 혼자 먹을 테니까.”
“벌써 너랑 먹고 있잖아? 그러니 네가 사근사근해져야지.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하아...어제가 그립네.”
“......”
낸시는 그 후로는 말을 아끼고, 우적우적 음식을 입에 넣고 씹었다.
평소에는 꽤 얌전히 먹는 타입인데 지금은 이렇게라도 불만을 표현해 보려는 모양이다.
로드리고도 놀려도 별로 반응이 없자 더 이상 자극하지는 않았다.
뭐든 임계점은 있게 마련이고, 이 이상 뭔가 신경을 건드려서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다.
“너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냐? 내가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어제 조금 어울려 주려고 했는데 내가 좀 피곤해서 약속 못 지켰으니까 오늘 뭐라도 해줄게. 물론, 나는 상당히 바쁜 사람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낸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도대체 이 낯선 곳에서 도련님이 뭐가 바쁘시다는 거예요?”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로드리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호의를 보이면 적어도 이런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 계집애,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완전 나를 물로 보는 거 아니야?
내가 그저께 그렇게 멋진 모습을 보였는데도 늙은이만 걱정하고...
차라리 엘가 누나랑 놀러 다니는 편이 훨씬 낫겠다!
얘는 내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모른다니까!
정말 미친다. 미쳐!
“여긴 내가 일이 있어서 온 거라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바쁘지!”
“그러니까 무슨 일이요?”
“그건 네가 몰라도 돼. 야, 솔직히 시골에서만 자란 네가 내가 뭣 때문에 바쁜지 말하면 알아들을 수나 있어?”
무시하는 로드리고의 말에 낸시도 기분이 상해 맞받아친다.
“그건 모르죠. 한 번 말해보세요. 제가 알 수도 있는 거니까.”
“말해도 입만 아프지. 내가 장담하건데 너는 절대로 몰라.”
“그럼 제가 모르는 그 일이나 빨리 어떻게 해보세요. 그래야 다시 마을로 돌아갈 것 아니에요? 약속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요.”
“뭐?! 이야~! 이거 정말...누구는 좋아서 그렇게 말한 줄 아냐? 너 정말 웃긴다. 잘 됐네! 잘 됐어! 그럼 나도 내 일이나 봐야겠다. 근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네? 너 내가 바쁜데도 네 손수건 찾아다 줬는데,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은 이렇게 안면 몰수하는 거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제가 무슨 안면 몰수했다고 그러세요? 저 분명히 손수건 이제 됐다고 그랬는데 도련님이 나가서 기어코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뭐라고? 그러니까 내 멋대로 내가 사서 고생했다 그거야?”
“그런 말은 아니지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그렇게 울상 짓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 너는 말만 안했지 나한테 나가서 찾아오라고 압박한 거나 다름없어! 너 그리고 손수건 받고 나한테 고맙다고 말 한마디 안했지? 그거 찾느라고 정말 고생했거든? 돈도 엄청 들고 말이야. 내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너 엄청 성가시고 돈도 많이 드는 애야. 알고 있어?”
“......고마워요. 됐죠?”
낸시는 뭔가 분한 듯 하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고맙다는 말 들어봤자 로드리고의 기분이 좋아질리 없다.
“‘됐죠?’는 왜 붙이는데?”
기어코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건다.
“......”
낸시도 더 이상 굽히기는 싫은 모양인지 말을 아낀다.
그때, 식당이 붐비고 있어 종업원이 와서 자리를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드리고는 어쩔 수 없이 계산을 치르고 낸시를 안으려했다.
하지만 낸시는 로드리고의 손길을 밀어내며 말했다.
“제가 걸을래요.”
“왜? 삐져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맞거든? 괜히 고집부리지 마.”
“고집 부리는 거 아니에요.”
“괜히 절뚝이지 말고 어서 안겨. 네 모습 사람들이 전부 웃음거리로 삼는다고.”
낸시는 결국 입술을 꾹 깨물고는 로드리고에게 안겼다.
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지 소매를 들어 몰래 닦아낸다.
그렇지만 바로 지척에서 그렇게 하는데 그걸 로드리고가 못 볼 리가 없다.
“야! 우냐?”
“...안 울어요....흐읍!”
“툭하면 우네. 하여간 여자란...”
“여자라...흐읍!... 우는 거 아니거든요.”
“암튼 콧물 묻히지 마라. 옷이 더러워지니까.”
낸시는 대꾸하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몇 걸음 더 옮기며 말했다.
“방금 것 농담인데?”
“......”
“재미없었어?”
“흐읍!...우는 여자애한테...흐읍!... 그런 농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무슨 농담해야 하는데?”
“자꾸...흐읍!... 말 시키지 마요.”
“아니 정말 몰라서.”
“......”
“근데 너 우니까 사람들이 전부 쳐다본다. 나한테 안겨있는 와중에 울기까지 하니까 어쩔 수 없나?”
이쯤이면 더 이상 낸시도 참을 수 없었는지 안긴 와중에 로드리고의 가슴을 마구치기 시작했다.
로드리고는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내며 아픈 척을 했지만 그럼에도 낸시의 분노는 한참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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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검은 빵과 스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만족스런 식사다.
아직 점심나절에 불과해 일을 하려면 좀 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래도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혹시 오늘도 찾아오지 않을까?
아니...더 이상 기대하진 말자.
그런 아이가 이런 데에 오는 건 비웃음만 살 뿐이야.
분명 실력 좋은 기사로 성공할 테니까...나중에 나 같은 여자를 안다는 건 분명 창피한 일이겠지.
그래도 딱히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은 아니야.
아니...부끄러운 짓을 했어야 더 좋았을까?
엘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무슨 생각이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몸 팔기 시작한 나이가 열다섯이었으니까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 건 아닐 거야.
으음....그만 생각하자.
자꾸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람?
그녀는 자기의 뺨을 양손으로 가리고는 열기를 식힌다.
그래도...이야기 속 기사님 같았어...정말로...
한스가 왔었을 때...
그녀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자기도 모르게 로드리고가 다시 찾아와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로 로드리고는 아니다.
그라면 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훨씬 상냥한 소리다.
엘가는 불길함을 느끼며 문 밖의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씨발! 누구긴 누구야?! 한스다! 썅년아! 야, 좋게 말할 때 문 열어! 응?! 너 내가 이 문 때려 부수고 들어가면 아주 아작 나게 맞는다?! 앞니 빠지고도 손님들이 찾아오나 시험해 보게 될 테니까 알아서 해! 그 코딱지만한 애새끼 여기 있지? 그때는 내가 방심해서 그렇게 됐지만 이번엔 아니야. 허리 다쳐서 어제도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했어! 어제 존나 큰 판이 있었는데 가지도 못했단 말이야! 가기만 했으면 분명 대박 났을 텐데....씨발...내 마누라한테 그 새끼가 돈 좀 줬던데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내가 그렇게 싸구려인줄 알아?! 애새끼 있는 돈 전부 털고, 새끼 팔다리는 부러뜨려야 수지가 맞지!”
엘가는 몸을 떨었다.
쉽사리 문을 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