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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05화 (105/200)

00105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따스한 오후였다.

오전엔 제이미경과 에린 크레이머가 겨루었지만 오후에는 딱히 계획된 일정이 없었다.

게다가 세뇨르 선생의 수업도 없다.

자작이 에린 크레이머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비욘느가 마음에도 들지 않는 에린과 함께 시간을 보낼 리는 없었다.

그렇게 말을 잘 들으면 자작이 고심할 필요도 없다.

비욘느는 훈련장이 보이는 그늘진 의자에 앉아 기사들이 땀 흘리며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기엔 에린 크레이머도 동참하고 있어 엄밀히 따지자면 자작의 지시를 완전히 어겼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물론 자작이 말한 의미는 이렇지 않았겠지만...

훈련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우렁찬 기합소리가 비욘느가 앉아있는 곳까지 들려온다.

그녀는 느긋하게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입가엔 짓궂은 표정이 걸린다.

내일 천재라고 불릴만한 그 소년을 데려와서 저 콧대 높은 에린과 붙게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는 저 소년이 절망에 빠져 무릎 꿇는 걸 꼭 보고 싶었다.

자기 또래에는 최고라고? 웃기지도 않는 망상이다.

그런 주제에 나를 비웃다니!

난 아직 제대로 검을 쥐어보지 못했을 뿐이야.

훌륭한 스승과 충분히 시간만 주어진다면 결코 여자라고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실력을 뽐내줄 수 있다구!

오늘 제이미경이 칭찬해주니 입을 다물지 못하더군.

하지만 내일 너랑 붙는 애는 그런 제이미경도 이긴 실력자라고!

너 같은 건 일 검에 끝장나는 거야.

두 번도 필요 없다 이거야!

어디 그때도 나를 무시할 수 있나 보자.

어떻게 비웃어줘야 가장 비참하게 비춰질까?

아니...아니지.

비웃지 말고 위로해 줘야 할까?

그것만큼 비참한 건 없을 거야.

져서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곁에서 말해줘야지.

‘어머~! 또래에선 당할 자가 없는 에린 공자가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했나 봐요. 다음에는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어려울 것 없잖아요? 이번에 일 검에 졌으니 다음번엔 저 소년이 검을 두 번만 휘두르게 해도 실력이 두 배가 되는 거니까요.’

“큭...큭큭...”

비욘느는 생각만해도 재밌는지 전혀 레이디스럽지 않은...아니 기준을 한참 낮춰 소녀스럽지 않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아마 세뇨르 선생이 이 웃음소리를 들었다면 분명 거품을 물었을 테지만 다행히 그는 여기에 없었다.

하지만 원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그녀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비욘느는 얼른 입가를 두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언제 왔는지 제이미경이 서있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푸웃! 제이미경 왜 여기에 있어?”

아직도 장난기가 얼굴에 다분한 모습으로 묻는다.

제이미경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은 기사들에게 잠시 휴식을 주었습니다. 너무 몰아붙이기만 한다고 실력이 느는 건 아니니까요. 그보다 아가씨는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비욘느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내가 뭘? 나는 아버지께서 에린 공자와 함께 있으라고 해서 이렇게 여기 있을 뿐이야.”

“그것 참 이상하군요. 에린 공자는 방금 전까지 저와 훈련장에서 수련을 했습니다만?”

“바로 그것 때문이지. 그가 한창 단련하는 중인데 내가 방해하면 안 되잖아? 훌륭한 세뇨르 선생님이 항상 가르쳐 줬는걸? 그런 건 레이디의 소양이 아니래.”

“물론, 세뇨르 선생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세뇨르 선생을 들먹이며 아가씨 좋을 대로 말씀하시는 건 그에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자작님의 지시는 이렇게 동떨어져 있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제이미경도 에린 크레이머가 거기서 훈련하는 걸 그대로 방치했잖아? 굳이 나한테 가보라고 말하지 않은 건 뭔데?”

“에린 크레이머 공자라고 확실히 호칭을 사용하셔야죠.”

“어머! 나는 지금까지 제이미경과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제이미경으로 변장한 세뇨르 선생님이었나봐?”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아가씨! 대체 왜 그런 말을 꺼내신 겁니까?”

“무슨 말? 지금 우리 호칭 이야기 하지 않았어? 나 도무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겠는 걸? 그럴 수밖에 없지. 나는 머리가 아둔한 계집애일 뿐이니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똑똑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순진해.”

“그만...제발 그만 하십시오.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사과드리겠지만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신 거라면 그건 잘못되었습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푸지 마십시오.”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고! 화를 풀어야 하는 사람한테 제대로 풀고 있는 거거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에린 크레이머 공자는 날 비웃었단 말이야. 그래서 혼내주려는 것뿐이야. 그렇게 잘난 것도 아닌데 콧대만 높고...저런 거 얄밉지 않아?”

“좀 더 자세히요! 저야말로 아둔해서 아가씨의 이야기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

“어제 조금 시간이 남아 산책을 했거든. 그러다 정원에서 에린 공자를 만났어. 그런데 검술 연습하고 있더라고.”

“그는 성실하니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이미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비욘느는 그런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 에린 공자 칭찬하려고 말하는 거 아니야! 끼어들지 말라고!”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럼 나도 더 이상 말 안할래.”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아가씨. 이 늙은이는 살아갈 날이 많지 않아 이런 거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흥! 이럴 때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나도 한 번 해보자고 그랬어. 그러니까 검을 건네주더라고. 근데 내가 몇 번 보긴 했어도 실제로 휘둘러 본 것은 처음이니까 어쩔 수 있었겠어? 좀 어정쩡했지. 그랬더니 ‘이건 장난감이 아니다.’, ‘막대기나 가지고 놀아라.’ 같은 말을 막 하는 거야.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그런 말을 막 하는데!? 나도 대 브라우닝 자작가의 일원으로서 그런 모욕을 받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저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 이야기에는 상당한 부분이 생략된 것 같습니다만...”

“그야 그렇지. 전부 이야기하면 지루할 테니까.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만 생략한 거야. 그러니까 전부 에린 공자가 나쁜 거고, 나는 아주 정당한 거지. 게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이미경도 브라우닝 자작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입장에서 에린 공자 편을 들어서는 안 돼. 그건 배신이라고.”

“저는 배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아가씨 편을 전적으로 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엔 사소한 것만 생략된 건 아닐 테니까요.”

비욘느는 볼을 부풀리며 마음에 안드는 표정으로 말했다.

“깐깐한 남자는 여자들한테 인기 없단 말이야!”

“저는 이미 늙은이입니다. 인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아우~! 아무튼 나는 몰라. 내일 공방에 가서 그 소년을 데려올 거야. 에린 공자가 큰 코 다치는 걸 보고 싶다고! 저런 애랑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아가씨! 에린 공자는 성실하고, 성격도 나쁘지 않습니다. 검술에 재능도 있는 편이고요. 남작의 말대로 저 또래에서는 상당한 실력자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지 아십니까?”

“그래서 뭐?”

“하아...그렇게 오래도록 노력해 온 뭔가가 송두리째 무너질 때, 그 절망과 허무는 아가씨께서 상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절대로 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벽을...저렇게 어린 날에 경험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몰라!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그렇게 에린 공자가 좋으면 남작가로 가버리란 말이야! 나한테는 검술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거짓말만 잔뜩 하고!!! 제이미경 정말 미워!!!”

비욘느는 잔뜩 화가 나서 뛰어가 버렸다.

아가씨는 왜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에린 크레이머 공자라면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연인이 될 터인데...

제이미경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훈련장 한켠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에린 크레이머 공작에게로 향한다.

아직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저리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니...

만약 내일 그 소년과 검을 마주하고 나서도 과연 저런 모습을 간직할 수 있을까?

분명 지금 같은 노력이 계속 이어진다면 언젠가 왕국 10강에 들 수 있을만한 자질이 저 소년에겐 있다.

하지만 천재는 아니다.

그가 보았던 그 소년과 같은 규격 외의 실력은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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