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로드리고는 정보길드를 나온 후에도 여관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낸시에게 무척이나 바쁘다고 말했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 들어가 버리면 ‘그러면 그렇지’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도련님이니까 대놓고 비웃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짓은 피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이 전부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면 분명 마을로 돌아가자고 보챌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돌아가진 않을 테지만 핑계거리를 생각해 내는 것도 솔직히 귀찮다.
하지만 문제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어쨌든 프레사는 타지다.
도시도, 사람도, 건물도, 거리도 그에게는 전부 낯설다.
좀 지루하기는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좀 걷자.
기다랗게 나있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도로엔 간간히 마차가 지나다녔다.
마부가 가볍게 휘두르는 채찍 소리가 시원스레 공기를 흔든다.
역시 도시의 밤은 시골과는 다르다.
밤인데도 발밑을 조심해야 할 정도로는 어둡지 않다.
곳곳에 불빛이 많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떠올려본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로드리고는 가끔 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러면 집집마다 밝혀두었던 불빛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고향 마을이야 생활도 빠듯하고, 절약이 생활이라 쓸데없이 불을 밝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엔 금세 캄캄해지고 만다.
그나마 밝은 거라곤 하늘 위에 떠있는 달과 반짝이는 별뿐이다.
어딘가 볼 일이 있어 밤에 걸음을 해도 만나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다.
전부 집에 틀어박혀 마누라의 가랑이를 벌리고 열심히 들락날락 할 뿐이다.
어두운 밤에 할 일이라곤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
하지만 여긴 어떤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시골의 숨 막히는 한적함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
역시 시골 따위는 나랑은 맞지 않아.
나는 좀 더 넓고 큰 도시에서 살아야겠어.
평생 땅이나 파고, 사람들이나 부리며 사는 삶은 얼마나 지루하던가?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긴 해야겠지만 그것이 내가 거기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걸 뜻하는 건 아니야.
이젠 검술도 할 줄 알아.
그리고 앞으로는 훨씬 더 대단해지겠지.
10년쯤 지나면 전쟁도 일어날 거야.
그리고 그 정도면 강해질 시간은 충분해.
나라면 분명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이번에 제이미경도 이겼고, 천재 검사라는 말도 들었잖아?
황혼의 기사는 진짜야.
그의 실력은 믿을만하지.
이것저것 전부 아는 것 마냥 말하는 것은 조금 짜증나지만 그래도 얻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난 내 손에 들린 것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다 커다란 집, 많은 돈, 모두가 부러워할 명예와 권력, 그리고 지위까지 모두 차지할 수 있단 말이야.
그리고 비욘느.
그래..비욘느.
왜 브라우닝 영지까지 와서 비욘느를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로드리고의 가슴에 묘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니, 이걸 통증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아픔과는 다르다.
감격? 격정?
아무튼 좋아.
뭐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녀를 만나보자.
어린 시절의 그녀를 보고 싶어.
다소곳이 앉아서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겠지.
레이스가 가득 달린 귀여운 모습으로 말이야.
너무 낸시만 생각했어.
걔가 다리를 다쳐서 경황이 없긴 했지만 정작 내가 가장 바래왔던 것은 어디까지나 비욘느였어.
그걸 잊으면 안 돼!
내 평생의 꿈을 만나는 거야.
조금만 노력하면 결코 조셉보다 못하지 않을 수 있어.
그녀가 반하는 게 조셉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다고.
물론, 낸시를 내치지는 않아.
다리도 고쳐줄 거고.
그래. 비욘느와 결혼하게 되면 그 사이에서 생기는 아이들을 돌보게 하자.
낸시는 아이들을 잘 키우니까.
유모를 시키면 항상 곁에 둘 수 있고, 내가 지켜줄 수도 있어.
나도 내 행복을 찾아야지.
내 꿈을 말이야.
그는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슴 깊숙이 행복감을 느꼈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그의 이런 행복감은 조금 더 지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혼자만의 망상에서 억지로 깨어나야만 했다.
콰앙~!
히이이잉~!
누군가 마차에 치였다.
말발굽에 심하게 짓밟혀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끔찍한 모습이다.
로드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창 좋았는데 저런 걸 보다니...
다른 길로 갔어야 했다고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이거 오늘밤 설치는 거 아니야?
그냥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빈민가 새끼들! 왜 여기까지 기어 나와서 일을 만들어?”
딱히 로드리고가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부의 말을 들으니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봐, 무슨 일인가?”
마차 안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거지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멈추었을 뿐입니다요. 다행히 말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으니 염려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곧바로 출발합지요. 나으리. 으랴! 으랴!”
마차는 덜컹거리며 사고를 당한 사람을 치우지도 않고 그 위를 그대로 밟고 지나가 버렸다.
로드리고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지나가던 사내 둘이 시체를 길가에 치워두는 것 외에는 그대로 방치해 놓자 마음이 쓰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난 여기 사람도 아니잖아?
딱히 어딘가로 가려던 게 아니라 길은 어디든 좋았다.
그저 시간만 적당히 때울 수 있으면 된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젠장...아! 젠장!!!”
그리고는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조금 전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걸어갔다.
로드리고 스스로는 아무리 싫다, 아니다 해도 시골 사람 성향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골 사람 특유의 소극적인 성향 때문에 먼저 나서서 뭔가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으면 꿍시렁 거리면서도 모질게 돌아서지도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일 텐데 내가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냥 가던 길 마저 가면될 텐데...
아..젠장...젠장...
여전히 시체는 그대로 그 장소에 방치되어 있다.
그저 사람들은 마차를 모는 데 방해가 되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거리를 관리하는 병사나 비슷한 뭔가가 와서 처리하겠지만 결코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다 간단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 성가신 일을 굳이 만들지는 않는다.
로드리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엉망이 되어 버린 시체를 조금 움직여봤다.
일단 얼굴부터 살폈다.
아는 얼굴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로드리고는 자기가 아는 얼굴인데 놀랐다.
엘가의 집에서 봤던 녀석이다.
칼 들고 설치던 그놈.
마누라도, 아이도 두드려 패기만 했을 녀석이다.
로드리고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느꼈던 혐오감의 자취가 다시 기억의 한켠을 스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연민도 느낀다.
“하아...그래도 시체는 가족에게 데려다줘야지. 젠장...”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집도 알고 있는데 이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깨에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역한 피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분명 옷도 엉망이 될 테지.
미친 새끼...왜 갑자기 마차에는 뛰어들었을까?
돈이라도 벌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생각이었다면 정말 구제할 길 없는 바보에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아...몰라.
일단은 엘가한테 가보자.
솔직히 이 자식 집은 밤에 엘가 뒤를 따라서 한 번 가본 게 전부라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없어.
헤매느니 차라리 엘가한테 안내해달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아...이제 엘가와 만나는 것도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또 이렇게 되네.
그런데 이놈이 죽은 건 잘 된 거야, 아니면 안 된 거야?
어차피 딱히 연고가 있는 사이가 아니라 슬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냥 인간이라면 죽음 앞에서 누구나 들기 마련인 조금 짠한 마음이야 있지만...
뭐 그래도 가족들은 울겠지.
암만 쓰레기든 뭐든 해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아...젠장...그런 거 보기 싫은데...
아무튼 엘가한테 안내 받고, 그 집 앞에 그냥 내려두자.
말 전하는 건 엘가가 전부 해 줄 거야.
그런 거 괜히 걱정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