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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10화 (110/200)

00110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으흐음...으흠...흠흠...”

입가엔 미소를 두르고, 콧노래가 이어진다.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프를 끓이고 밀가루를 반죽해 빵을 굽는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따뜻한 행복이 그녀의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걸 엘가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문이 열리고 벤이 뛰어 들어오겠지.

오늘도 분주하게 들판을 뛰어다니고, 옷에는 가득 흙먼지가 묻어 있을 거야.

아니면 진흙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어딘가 찢어져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그러면 나는 저녁 준비를 멈추고 릭을 돌아보겠지.

허리에 양 손을 울리고 벤을 노려보며 혼을 내는 거야.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엄마가 뭐랬어?

빨래하기 힘드니까 옷 좀 깨끗하게 입으라고 했잖아?

그래도 릭은 딴청을 부리고, 곧이어 릭도 문을 열고 들어와.

그는 벤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부터는 그러지 조심하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알고 있어.

내일도 분명히 옷을 엉망으로 만들겠지.

벤은 장난꾸러기니까.

가족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아 신에게 기도하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꿈만 같은 행복이 내게 머물고, 나는 그렇게 늙어가고, 어느새 손자와 손녀로 집안은 더욱 북적거리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벤은 릭의 젊은 시절을 닮고, 손자는 릭의 어린 시절을 닮고...

나는 새빨갛게 물든 황혼녘에 흔들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노곤한 몸을 쉬게 할 거야.

손주들이 내 곁에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내가 어려서 듣던 이야기를 꺼내지.

숨죽이고 진지한 눈으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느낄까?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은 행복이구나.

그날 릭은 내게 행복을 주었어.

그래...그날...

그날?

그날????!!!!

지금까지 엘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행복하기만 했던 장면들은 흐릿하게 변하고 그녀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엘가...

....엘가....

..........엘가....

파르르 눈꺼풀이 떨려왔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끌려 그녀는 눈을 떴다.

“엘가! 엘가!”

아직도 의식이 몽롱했다.

얼굴에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다.

아직도 흐릿한 시야에 애써 힘을 주고 초점을 맞추었다.

좁은 집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내려다본다.

“무슨...?”

“다행이야! 하룻밤에 송장을 두 개나 치우게 되는 줄 알았지 뭐야?”

옆집에 사는 메리 아주머니가 눈이 촉촉해져서 말했다.

“......”

순간 엘가는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릭...

한스...

그리고 나.

그녀는 묻고 싶었다.

릭은요?

그는 어떻게 되었어요?

물론, 괜찮은 거죠?

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녀의 의문을 소리로 만들지 못했다.

눈물이 차올랐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하악...하악...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조금 전 놓쳤던 단어가 느지막하게 그녀의 뇌를 스친다.

송장...

하악...하악...하악...

“흐윽...흑흑...흐으윽....”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울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은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일찍이 이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아버지를 여의었던 그 때를 떠올렸다.

삯바느질로는 도무지 의사를 부를 수 없었다.

몸을 팔았다.

남자는 주정뱅이였다.

시큼한 술 냄새가 진동하는 입술로 엘가의 순결한 입술과 가슴을 유린했다.

그것도 질렸을까?

바지춤을 내리더니 거침없이 그녀의 가랑이를 헤집고 물건을 박아 넣었다.

통증으로 온몸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사내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거칠게 소녀의 몸을 다루고,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내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의 처녀는 은화 다섯 개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은화 다섯 개는 그렇게 큰돈이 아니었다.

돌팔이로 소문난 의사를 겨우 집으로 불러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래도 돈은 돌려주지 않았다.

엘가는 다음날도 몸을 팔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용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돌팔이 의사를 부르고, 평소에 먹던 것보다 맛있는 것을 아버지를 위해 준비했다.

아버지는 대체로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오면 물었다.

“돈이 어디에서 난거냐?”

어떻게 몸을 팔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도와줬어요.”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때 엘가의 입가엔 억지스럽고 처량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팔고, 맛있는 것을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들고 있던 음식은 바닥에 흩어지고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조용히 흐느꼈다.

세상에 이제 자기 혼자라는 사실이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갑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품에 억지로 파고들어 이제는 그 어디에도 없는 온기를 찾아 헤맸다.

그래...이건 이미 한 번쯤 경험해본 일이야.

그렇게 대수로울 것도 없어.

다시 한 번 혼자가 되었을 뿐이다.

삭막하고 무정한 세상을 3년간 해쳐왔던 것처럼 다시 앞으로의 몇 년을 살아가면 되는 거야.

이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비틀거리며 다시 한 발짝...그리고 다시 한 발짝...

언젠가는 그대로 넘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오겠지.

내게도 오는 거야.

그 날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그리고 이제는 릭이 그런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눈물도 흐느낌도 멈추질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바닥엔 그날의 아버지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릭이 누워 있었다.

한밤중에 시체를 밖에 내어놓아선 들개가 달려들어 먹어버릴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마도 오늘밤까지는 릭이 나와 함께해 주겠지.

하지만 내일은 떠나버릴 거야.

영원히...내가 꿈꾸고 싶었던 행복을 가지고 아주 멀리 가버리겠지.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한 걸음...그리고 다시 한 걸음...

마침내 릭의 곁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그의 품에 파고든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부드럽던 목소리와 손길이 떠오른다.

안녕...

이제 안녕...

그녀는 그의 몸뚱이를 붙들고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인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점점 차갑게 변해간다.

그것이 슬펐다.

그의 시체는 곁에 있지만 그녀는 혼자다.

그걸 엘가는 깨달았다.

더 이상 그는 여기 없다.

이것은 더 이상 그가 아니다.

아무리 안녕이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짓이야.

나도 그대로 눈을 뜨지 않았었더라면...그랬더라면 난 그 장소에서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릭...너는 괜한 것을 내게 보여주었어.

나는 이대로...이대로 혼자서 어떻게든 살고 있었는데...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혼자 남게 되었을 때의 고독과 슬픔은 내가 다시 한 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사무치게 누군가가 살아있는 사람이 그리워졌다.

엘가는 누군가 자신을 꼭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괜찮다.

주정뱅이여도, 도박꾼이어도, 도둑이어도...

심지어 다시 한 번 엘가를 홀로 남게 만든 한스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꼭 껴안아 주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좋다.

그 사람이 따스한 온기를 가진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녀는 신을 찾았다.

누군가를 보내주기를 간청했다.

하지만 신은 그녀의 기도를 대체로 들어주지 않는다.

딱히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상냥함이 묻어나는 소리다.

엘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로 주정뱅이도, 도박꾼도 아니다.

그런 자들이 두드리는 울림은 이런 소리가 아니다.

엘가는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누굴까?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던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여길 찾을 이유는 없다.

그녀는 어찌되었든 문을 열었다.

지금만큼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문 앞에는 누군가를 어깨에 걸친 채 로드리고가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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