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로드리고가 막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엘가가 갑자기 로드리고의 머리를 두 팔을 벌려 꽉 껴안아 버렸다.
로드리고는 무슨 일인지 몰라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인 여성의 풍만한 가슴이 조금이지만 그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품은 그에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오래된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정확히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낡아버린 하나의 흔적에 불과하다.
그저 아련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엘가의 가슴은 그때 느꼈던 어떤 이미지가 잠시 떠오르고 그것이 꽤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고 그에게 속삭여 주는 매개체였다.
조금 더 그녀의 품에서 조용히 하지만 아주 뚜렷하게 약동하는 고동소리를 들으며 희미한 추억에 잠기다보면 그 이미지는 보다 뚜렷하게 변할 것이다.
그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엘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그가 과거를 향해 있는 힘껏 뻗었던 손을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다시 떨어져 내렸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날 안아줘. 제발...날 안아줘...”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호소력이 있었다.
게다가 습기 가득한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 깊이 잠자던 어떠한 마력이 지금 이 순간 깨어나 로드리고를 사로잡았다.
저항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로드리고는 엘가를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말에 따르자.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논리도, 이성도 모두 뒤편으로 훌훌 던져버리고 오로지 당위와 감성만 남겨서 그녀의 바람을 이뤄주어야 한다.
그는 한 팔을 들어 그녀를 안아주었다.
어깨엔 시체가 얹혀져있어 도무지 모양새가 나진 않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시체를 쿵 하고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 것 같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조용한 흐느낌은 차츰 수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는 쏟아내기 힘든 슬픔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는 조금 주저하다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엘가는 로드리고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응.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듣고 있는 로드리고의 가슴마저도 욱신거리게 할 만큼 처량한 목소리였다.
뭔가 할 수 있다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섣불리 손을 대었다가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질 것만 같은 아찔함이 느껴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적어도 지금은 그녀가 그녀의 입으로 말해주지 않는 한 로드리고는 그저 ‘좋지 않은 일’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답답한 일이었고, 스스로가 무척이나 무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엘가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로드리고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는 이렇게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의 실마리를 놓치고 말았지만 덕분에 보다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두웠지만 로드리고는 그녀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눈으로 봐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로드리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드리고는 그걸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녀의 이끌림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녹슨 경첩의 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문이 닫혔다.
집 안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코를 벌렁거리며 살짝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그가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한스의 시체에서 풍기는 냄새가 밀폐된 공간이라 후각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로드리고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보곤 물었다.
“누구예요?”
“릭이야.”
“술이라도 취한 거예요? 왜 저러고 있죠?”
“...글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술이 취한 거라면 내일 아침이면 멀쩡하게 다시 일어날 테니까.”
“......”
로드리고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다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양초도 램프도 아무것도 켜져 있지 않아 어두웠지만 희미한 달빛으로 바닥에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엘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죽었어. 조금 전에.”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로드리고는 순수하게 엘가를 위로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의 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자식이 뭔가 나쁜 짓을 했겠죠. 절대로 누나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릭은 내게 항상 잘 해줬어.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이었지만 언제나 부드럽게 나를 안아줬어.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내 기분도 생각해줬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어. 하지만 이젠 죽어 버렸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 나를 안아주지도 않고, 어떤 말을 해도 대답해주지 않아. 그는...떠난 거야. 바보같이...내 말을 들었더라면...아직 그는 내 곁에 있었을 텐데...나는 조금 전까지 굉장히 행복했는데...지금은 아주 이상해. 어떻게 이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나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까?”
“......”
정말로 로드리고가 뭔가 말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혹 그녀가 뭔가 듣기를 원했더라도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엘가는 멍하니 서 있다가 로드리고가 어깨에 누군가를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곤 물었다.
“그건 누구야?”
지금 상황에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그녀에게 한스의 집을 안내해 달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로드리고는 어깨에서 한스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워서 누군지는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스예요. 전에 왔을 때, 저한테 칼 휘둘렀던 놈이요. 저쪽 거리에서 마차에 치여 죽은 걸 발견해서 데려왔어요.”
“......”
어둠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엘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나?”
“......”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음울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슬프고 추악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으..으흐흑..아..하하하...아하하,,,하하...하하하! 죽었다고? 한스가 죽었어? 정말로? 어디 봐야지? 죽어버린 그의 얼굴을 봐야겠어.”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들여다봤다.
이리저리 손으로 그의 얼굴을 돌려가며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말했다.
“정말 한스야. 그가 죽었구나. 거짓말이 아니었어. 이봐, 한스?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응?”
하지만 죽어버린 한스가 뭔가를 말할 리가 없다.
그녀는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자기 침대로 가더니 바닥에서 뭔가를 뒤적거렸다.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손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걸 한스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가져와 그의 몸 위에 올려 두고 말했다.
“내가 몸판 돈으로 도박해서 성공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죽어버렸네? 응? 아하하하! 완전히 죽어 버렸어. 이제 움직이지 못해. 그렇지? 아무 말도 못해. 욕도 못하고, 때리지도 못해. 하지만 잘 되었어. 안나 언니는 몸 팔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지? 여기 이렇게 돈이 있는데 말이야. 이런 것 따위 그냥 줘버리는 건데...그랬으면...아아...”
평소 듣던 엘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지 광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에 로드리고는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창녀지만 꽤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던 엘가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한스는 나쁜 놈이지만 죽어버렸는데 조롱하다니...그녀의 가치가 쓸데없이 낮아지는 것 같아 말리고 싶었다.
“저기 아무리 나쁜 놈이었어도 죽었는데 좀...”
로드리고의 말에 엘가는 한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네. 한스는 확실히 죽었는데...이러는 건 좋지 않을지도 몰라. 로드리고는 정말 착하구나. 나 같은 것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럼 이제 나를 혼내줄 거야? 나는 나쁜 사람이니까?”
그녀의 물음에 로드리고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엘가는 확실히 이상했다.
아무래도 오늘밤 로드리고가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은 꽤나 허황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릭이라는 사람을 죽인 건 누굴까?
혹시 그녀일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말해주지 않을까?
이제는 그저 빨리 한스를 녀석의 집까지 짊어다주고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딱히 나쁘다고 말한 건 아니에요. 제가 착한 사람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