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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13화 (113/200)

00113  결투  =========================================================================

로드리고는 엘가가 깨지 않게 집을 빠져 나왔다.

새벽이라 공기는 차게 식어 있었다.

뺨을 스치는 서늘함이 그의 피로감을 조금 물러나게 한다.

역한 피 냄새로 마비되어 있던 후각도 다시 기능을 되찾았다.

그는 떠나기 전에 잠시 동안 몸을 돌려 엘가의 집을 바라보았다.

기다렸다가 그녀가 깨어나면 간단한 인사라도 건네고 떠나는 편이 더 좋을까?

아마도 그편이 그녀에겐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또다시 그녀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곁에 있어 달라고 고집을 부리면 그걸 거절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헤어짐이다.

하룻밤 그녀의 곁에 있어준 것만 해도 이미 나는 내가 할 일을 전부 한 셈이다.

이 이상 여기에 머물 필요는 없다.

지금 가는 것이 그녀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좋다.

엘가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해줄 용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오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꽤 지쳤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곳에서 늘어지게 잠을 청하고 싶었다.

혹 도시를 떠나기 전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찾아와서 만나는 것도 괜찮겠지.

그때라면 그녀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든다.

소중한 것도 하찮은 것도 결국은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그는 그대로 망설임을 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여관방에 도착하자 문은 잠겨있었다.

낸시 모르게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그래. 나야. 문 좀 열어줘.”

로드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낸시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뭐가?”

피곤한데 옆에서 쫑알거리자 짜증이 난다.

하룻밤 외박을 했으니 뭔가 잔소리를 할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 줄 기분이 아니다.

“피요! 옷에 온 통 피가 묻었잖아요!”

그제야 로드리고는 자신의 옷을 살폈다.

어깨에서부터 상반신의 일부에 핏자국이 보인다.

축축하진 않고 이미 말라버려 검붉게 변해 있었지만 확실히 핏자국이다.

한스라는 놈을 어깨에 짊어지고 엘가의 집까지 갔더니 놈의 피가 옷에 묻은 모양이었다.

어제는 밤이라 어두워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래서는 아무래도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별 것 아니야.”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낸시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다.

“그럼 대체 어떤 일이 별건데요?!”

“글쎄? 호환, 마마, 전쟁 같은 거?”

“이것도 충분히 큰일이에요!!! 어제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예요?! 어디 다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내밀어 로드리고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상처가 있는지 살피려는 것 같았다.

“얘가 왜 이래?! 야! 이거 놔! 다친데 없어! 무슨 여자애가 남자 옷을 함부로 벗기려 드는 거야? 어이없네, 정말.”

하지만 핀잔을 주어도 낸시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어차피 빨아야 하니까 일단 벗어 봐요. 혹시 어디 다쳤을지도 모르고.”

“이거 다른 사람 피야. 마차에 치여서 죽은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줬을 뿐이라고. 거기서 좀 일이 복잡해져서 돌아오지 못했고. 그보다 밤새 한숨도 못 잤어. 피곤하다고. 자야겠으니까 조용히 좀 하자. 응?”

그는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 잠을 청했다.

옆에서 낸시가 뭐라 말했지만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낸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로드리고는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피 묻은 옷도 그대로 입고 있는 채다.

저래선 빨래도 할 수 없다.

대체 마차에 치여서 죽어버린 사람을 왜 집까지 짊어져서 데려다 줘야 했던 걸까?

그런 건 어른들이 하는 일이지 않나?

물론, 시체를 방치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12살짜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시체를 가져다 줬으면 곧바로 여관으로 왔어야지 거기서 어린애가 할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얄밉게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낸시는 화가 났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들어오지 않으니까 걱정 되서 잠들 수 없었다.

새벽녘에는 살짝 졸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애타는 사람 심정도 생각해 줘야지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만 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혹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으면 주인님과 마님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밤새 돌아오지 않는 로드리고를 걱정하며 괜히 빨리 볼일을 보고 오라고 닦달하며 내보냈던 스스로를 수없이 탓했다.

그런데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이렇게 쓰러져서 자버리다니...

낸시는 로드리고를 노려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는 나지만 그녀 역시 밤새 쌓인 피로를 이기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느 새 로드리고 옆에 누워 잠들어 버렸다.

그녀 역시 로드리고보다는 작지만 코를 고를 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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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크레이머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아직도 어둠이 남아있는 시간 눈을 뜨고 대충 몸을 씻는다.

움직이기 쉬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오랫동안 함께해온 검을 집어 든다.

든든함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무리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

그가 방을 나서자 벌써부터 분주하게 오고가는 하인과 하녀들이 인사를 건넨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훈련장에는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새벽을 가르는 태양을 맞으며 그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집을 매끄럽게 빠져나온 검이 눈부시게 빛났다.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어려운 동작은 되도록 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볍던 움직임은 점차 절도가 있게 변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지러운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어느새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거칠게 변해버린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무리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힘이 과하게 들어가 버렸는지 좀처럼 거친 숨결이 잠잠해지질 않는다.

제대로 힘을 분배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다.

그때 누군가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어제 자신을 지도해 주었던 제이미경이 서있었다.

“훌륭하군. 매일 이른 아침부터 훈련하나?”

에린 크레이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말했다.

“조금도 훌륭하지 않습니다. 감정에 휘둘려서 제대로 힘 조절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하하! 자네는 내 평가도 믿지 못하겠는 모양이군. 하긴 나 같은 하찮은 실력으로 자네를 칭찬해봐야 별로 기쁘지도 않을 테지.”

에린 크레이머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히 제가...”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좋네. 그저 노인네의 농일 뿐일세.”

하지만 그럼에도 에린 크레이머는 진지한 표정을 고수하며 말했다.

“저는 정말로 제이미경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다만 경의 칭찬은 제게 과분해서 했던 말이니 부디 언짢으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이거 정말...농담도 못하겠군. 자네는 너무 진지해. 에린 공자, 내가 어제도 이야기했듯이 자네 나이 또래에서 그 정도 실력이면 절대로 부끄러운 실력이 아닐세. 그러니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검을 휘둘러도 좋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일세...하아...세상에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이 있다네.”

“?”

“오늘 대련에서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에린 크레이머는 제이미경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연민을 엿본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제가 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시나 상대는 기사입니까?”

제이미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그저...천재일 뿐이야. 빌어먹을...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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