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결투 =========================================================================
에린 크레이머는 제이미경이 뭔가 더 말해주길 기대했다.
오늘 겨뤄야 하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제이미경의 말은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한차례 에린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훈련장을 떠났을 뿐이다.
에린은 그의 눈빛에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엿본 것 같았다.
몇 번 더 검을 휘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결국 검을 내리고 말았다.
새벽 훈련을 마치고, 땀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비욘느가 자리를 차지하고 한켠에 앉아있었다.
브라우닝 자작이나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비욘느는 턱에 손을 괴고 앉아 있었는데 무척이나 교양이 없는 계집애처럼 보였다.
에린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걸 지적하진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을 뿐이다.
역시나 비욘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는 비욘느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결혼하게 될 상대라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계집애와 가깝게 앉아 살갑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에린의 모습을 콧방귀를 뀌며 쳐다보던 비욘느가 말했다.
“아버님과 크레이머 남작님은 서재에서 따로 식사를 하실 거라고 했어...요.”
아마도 두 분이서 따로 비밀스럽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레이디와 저 둘이서만 아침을 들면 되겠군요.”
“그러던가...요.”
한 템포씩 늦는 ‘요’가 무척이나 신경을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에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참았다.
이런 도발에 넘어가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귀족적이지 못하다.
저런 어린 계집애와 똑같이 상대해 주었다간 내 수준도 똑같아지고 만다.
곧 하인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비욘느도 에린도 딱히 식사 중에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음식을 씹고 목에 넘겼다.
음식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빵은 아직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질 좋은 밀을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고기는 어떤가? 적당히 익힌 육즙이 그의 혀를 즐겁게 한다.
에린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비욘느가 반응했다.
“푸훗!”
에린은 그제야 자기 실책을 깨닫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더 이상 요리의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비욘느가 말했다.
“그렇게 맛이 좋다면 더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에린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이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럼 그러던가...요.”
에린은 잠시 잠자코 있었지만 그도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결국 불만을 표출했다.
“대체 왜! 말 꼬리를 늘리는 거요?!”
비욘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요? 제가 그랬어...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명백히 놀리는 투로 묻는다.
에린은 분노와 수치감, 그리고 조금 전 저지른 실수로 인한 스스로의 자책감으로 입가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분명히 말꼬리를 늘리고 있소! 지금 방금도 그러지 않았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에린은 식탁을 쾅 소리가 나게 손으로 내려쳤다.
옆에서 식사를 돕던 하인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건 비욘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에린이 그렇게까지 반응하자 조금 겁을 집어 먹었다.
하지만 곧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 뭐야?! 정말 별꼴이네. 별것도 아닌 걸로 저렇게 화내다니? 완전히 좀생이 아니야?
내가 검 좀 잠깐 쓰겠다고 했을 때, 노발대발하며 도로 빼앗던 걸 보고 짐작은 했지만 이건 정도가 정말 심하네.
저런 남자랑 어떻게 한평생을 살라는 거야? 절대로 안 돼!
“지금 저한테 화내는 거예요?!”
더 이상 말꼬리를 늘리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꼬마 계집이 에린을 쳐다본다.
에린은 충분히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지만 저렇게 상대방이 노려보자 그 마음도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저런 버릇없는 계집애는 조금 기를 죽여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나중에도 기고만장해서 제멋대로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화냈다고 말하는 건 절대로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일단, 상대방이 자신을 비난할 여지를 주는 셈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아버지나 브라우닝 자작의 귀에 들어가면 더욱 입장이 난처해진다.
우선은 부인하자.
뻔뻔하게 부인해서 상대방의 복장을 긁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화낸 적 없소.”
비욘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분명히 식탁을 쾅하고 내려쳤잖아요?!”
“아하! 그것 때문에 오해한 모양이구료. 걱정 마시오. 그건 벌레를 잡으려는 행위에 불과했소. 아주 오만방자한 벌레였는데 내가 방금 확실히 쫒아내 버렸소. 더 이상 신경을 거스르지 못하게 놀래켜 주었더니 아주 잠잠해졌소.”
비욘느는 아직 어렸지만 에린이 말하는 벌레가 자기라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응수하는 에린이 미치도록 미웠다.
게다가 잘 보면 입가에 아주 미세하게 미소가 감돈다.
무척이나 얄미웠다.
자기가 잘난 줄 알지!
지금도 내가 어리다고 괄시하는 것 보란 말이야!
여긴 우리 집인데 멋대로 찾아와서는....자기 좋을대로 하는 게 정말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그 벌레는 어디 있죠?!”
“이런! 레이디, 내가 말하지 않았소? 쫒아내 버렸다고. 잡았다고는 하지 않았소.”
“......”
그래.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라지.
이제 조금 있으면 천재 검사한테 얻어맞고 울지나 마라.
내 분은 전부 그 소년이 풀어줄 테니까.
자기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달으란 말이야!
가장 비참하게 지고 말걸!?
내가 절대로 봐주지 말라고 말 할 거야!
흥! 제이미경은 저놈을 제대로 몰라.
그러니까 저런 놈 편이나 들어주는 거지!
나한테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모르니까...그러니까...
분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매서운 눈빛으로 에린을 노려본다.
하지만 에린은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겨우 감정을 추슬러 비욘느가 말했다.
“그럼 천재 검사를 만나러 가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약속은 꼭 지키길 바라겠소.”
“공자나 잘 지키시죠!”
“입회인은 누구요?”
“입회인은 필요 없어요. 어차피 실력을 겨루는 건 성에 와서 할 테니까. 아버님과 크레이머 남작님도 보는 앞에서 말이에요!”
“그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입회인이 더 있을 것 아니요? 아! 아직 어리니까 모를 수도 있겠군. 내가 괜한 것을 물었나보오.”
“으으으!!!”
이번에는 비욘느가 식탁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이런! 지금 화낸 거요?”
“벌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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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느와 에린 크레이머는 준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는 제이미경도 함께했다.
자작은 제이미경 외에 다른 기사를 붙여 주려고 했지만 오히려 제이미경이 보호자로 따라가고 싶다고 간청하여 허락해 주었다.
아직 오전의 상쾌함이 남아있는 시간이었다.
아가씨와 에린 공자를 바라보던 제이미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몇 년 만 지나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구나.
하지만 그 시선을 느낀 비욘느는 뭔가 기분이 상했는지 제이미경의 무릎을 손으로 탁 소리가 나게 때렸다.
제이미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하고 웃었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 공방 거리에 도착했다.
제이미경이 예전에 와봤던 곳에 가서 물어보니 주인은 아직 그 소년은 물건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제이미경과 에린 공자, 그리고 비욘느는 아침부터 소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