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결투 =========================================================================
로드리고는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낸시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그런 로드리고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는데 그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뭐가요?”
“왜 그렇게 쳐다보냐구?”
“그냥 보는 거예요.”
“오호? 그래? 너 지금 눈빛이 이런 모양이거든?”
로드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기에 자기 손으로 쭉 잡아당겨 더욱 가늘게 만든다.
“그렇게 본 적 없거든요?”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무튼 너 엄청 못생겨 보이니까 그런 거 그만 두란 말이야.”
“...어제는 대체 뭐예요?”
낸시는 로드리고의 말을 받아들여 적개심어린 표정은 그만 두었지만 그렇다고 목소리가 상냥해진 것은 아니었다.
“알면 뭐하게?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그보다 배고프다. 내려갈까? 뭐라도 먹자.”
“말 돌리지 말아요! 저한테 이야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밤늦게 돌아다니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는 마을까지 도련님을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야 하는 책임이 있단 말이에요!”
“야, 뭘 그렇게 심각해지고 그래? 어차피 어젯밤에 날 내보낸 것도 너였잖아? 안 그래? 나도 원래는 일보는 건 낮에 하고 싶지. 그런데 네가 하~~~~~~도 빨리 일 보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지.”
“그래서 어제 그렇게 늦은 게 전부 제 잘못이라는 거예요?!”
로드리고의 ‘나는 잘못 없다’는 책임 회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낸시는 조금 언성을 높였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런 걸로 너를 비난할 생각은 없어.”
“어제 제가 도련님께 빨리 일 보고 돌아오라고 한 건, 그렇게 늦게 돌아다니라는 의미는 아니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자세히 말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좀 오해가 있었나보다. 그러니까 그런 건 이제 그만 묻어두고 밥이나 먹자니까.”
“어떻게 밥이나 먹어요?!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고 이렇게 설렁설렁 넘기려고만 하는데!!!”
이 계집애, 대체 뭐야?
오늘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나보네.
아...젠장.
좀 늦을 수도 있는 거지.
누구는 좋아서 늦은 줄 아나?
“그럼 어쩌라고?”
“다시는 그렇게 늦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뭐 그런 거야 못할 것도 없지. 약속이야 원래 별 일 없으면 되도록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니까.
“약속! 그럼 된 거지? 이제 밥이나 먹자.”
“옷부터 갈아입어야죠! 그런 옷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것도 그러네. 그럼 갈아입을 테니까 내 벗은 몸 꼼꼼히 보고 감상을 들려줘. 알았지?”
“보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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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좀 과식을 했는지 나른했다.
“아...그러고 보니까 네 목발 찾으러 가는 날이 오늘이었지.”
막 떠올랐다는 듯 로드리고가 중얼거리자 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그럼 찾으러 갈까요?”
별로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지만 눈빛이 반짝인다.
그걸 보자 로드리고의 눈도 반짝하고 빛난다.
“뭐, 하루 이틀 늦는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내일 갈까? 오늘은 피곤하고. 좀 더 자야겠어. 너도 졸리지?”
“저는 안 졸린데요! 아주 멀쩡해요.”
“아니야. 너 아무리 봐도 졸려 보여. 내가 딱 보면 알아.”
“정말 멀쩡해요. 그리고 오늘이 약속한 날이니까 당연히 오늘 찾으러 가야지요. 만들어 주신 분도 기다리실 텐데 특별히 바쁜 일도 없는데 일부러 가지 않는 건 실례예요.”
낸시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조급한 모습을 내비친다.
“그럼 그럴까?”
“예!”
낸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로드리고는 좀 더 놀려볼 요량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피곤하니까.”
“그...그런...”
“그래도 뭐, 식사도 했으니까 잠깐 산책이라도 할 겸 그냥 다녀올까?”
“그래요!”
“아니다. 그만 관둬야겠다.”
“왜요?!”
“그냥.”
“......”
낸시는 살짝 입술을 깨물지만 더 이상 나를 조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로드리고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너 더 먹을래?”
“아니요. 배불러요.”
“그러지 말고.”
“정말 됐다니까요!”
목소리가 날카롭다.
더 이상 놀렸다간 다시 풀어주기 곤란할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 두기로 한다.
“그럼 목발이나 찾으러 가자.”
하지만 낸시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살폈다.
“정말요?”
“그렇다니까. 어쩔거야?”
“뭐가요?”
“안길거야? 아니면 업어줘?”
“...업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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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안 와?!”
비욘느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제이미경이 옆에서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딱히 시간을 정한 것은 아니니까요. 조금 더 기다리다보면 나타날 겁니다.”
“그래도...배고프단 말이야.”
“그럼 공방 주인에게 뭐라도 먹을 만한 것을 얻어 보겠습니다.”
막 제이미경이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에린 크레이머가 그런 제이미경을 말리며 말했다.
“제가 주인에게 말하겠습니다. 제이미경은 시종도 아닌데 그런 일을 시킬 수야 없지요.”
그 말을 하며 에린은 한차례 비욘느를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시선 속에 담겨있는 질책을 느끼며 비욘느는 울컥하고 화가 났지만 곧 그 소년이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에 주먹을 쥐곤 꾹 참았다.
하지만 에린이 시선에서 사라지고 나자 제이미경에게 말했다.
“흥! 나 쟤 정말 싫어.”
“대체 어디가요?”
제이미경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비욘느는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전부 말이야! 생긴 것도 싫고, 목소리도 싫어! 그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딘지 음침하단 말이야!”
“글쎄요.”
제이미경이 비욘느의 말에 동조해주지 않자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출했다.
“제이미경은 잘 몰라서 그래. 하긴...계속 쟤 좋아했으니까. 이젠 나 같은 것보다 쟤가 훨씬 더 좋은 거지? 그렇지? 내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설마요. 저는 에린 공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아가씨에 대한 제 애정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그럼요. 믿어도 좋습니다.”
“그래도 조금 뒤에 그 소년한테 에린 공자가 지면 위로해 줄 거잖아? 나랑 같이 비웃지 않고.”
“그건 다른 문제지요.”
“흥! 뭐, 그 정도는 내가 봐주겠어.”
“하하! 그것 참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로드리고가 들어선다.
문 앞에서 내려줬는지 낸시도 절뚝이며 따라 들어온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비욘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달려갔다.
“왔구나! 정말 잘 됐다!”
어느새 로드리고의 손까지 꽉 움켜쥐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로드리고가 말했다.
“아...안녕하세요. 저도...반갑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무슨 일은 무슨 일! 네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찾아온 거지!”
“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투로 로드리고가 물었다.
“결투해줘! 나를 위해서 말이야! 응?”
“뭐..뭘해요?”
뜬금없는 말에 로드리고는 한 발짝 물러서며 억지로 비욘느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좀처럼 손을 놓으려하지 않았다.
“결투! 팍해서 타닥 하면 끝나! 아주 허접한 애야. 너는 제이미경도 이겼으니까 그러니까 분명 간단할 거란 말이야.”
이 미친 계집애가 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결투를 왜 해? 얘 정말 어이없는 앤데?
전에도 제이미경하고 결투하게 하더니 이번엔 알지도 못하는 놈하고 또 붙으라고?
내가 검투사냐?! 그렇게 하고 싶으면 자기가 하면 되지, 아무 상관없는 나는 왜 물고 늘어지는 거야?
“싫은데요.”
로드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비욘느는 자기가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물었다.
“뭐..뭐라고?”
“그러니까 싫다고요. 솔직히 칼싸움 하는 거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위험하고.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제이미경하고 싸웠지만 전 원래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거 영 맞지 않아요. 뭐, 전엔 제 실력이 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확인했고...그리고 어젠 의도치 않게 피도 본 참이라 내키질 않네요.”
“그...그런...”
비욘느가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고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드리고의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이런 부잣집 아가씨 기분에 일일이 맞춰줄 수는 없다.
뭣보다 나를 꽤 대단한 사람의 제자로 알고 있으니까 거절한다고 어떻게 하진 않을 것 같고.
그때, 에린 크레이머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빵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에린도 로드리고를 봤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라고 생각지는 않은 모양이다.
뭣보다 자기 또래도 아니었고,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일단 빵을 제이미경에게 권하고 다시 움직여 비욘느에게 내밀었다.
비욘느는 에린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먹기 싫다는 표현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에린은 비욘느가 배고프다고 해서 얻어왔는데 이렇게 투정을 부리자 화가 났지만 그래도 낯선 소년과 소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남은 빵을 낸시에게 내밀며 말했다.
“귀엽게 생긴 레이디, 여기요.”
낸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로드리고는 울컥하고 가슴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