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6 결투 =========================================================================
이 새끼 뭐하는 거야? 낸시랑 나는 방금 전에 밥 먹고 왔거든?
어디서 시답지 않은 빵 쪼가리로 껄떡이는데?
그런데 이 새끼도 이 새끼지만 낸시 이 망할 계집애는 왜 그걸 받는 걸까?
내가 조금만 먹으라고...돼지 되면 싫다고 타박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먹였는데 그러면 안 되지!
낸시를 향해 팍팍 인상을 쓰던 로드리고는 시선을 돌려 에린 크레이머를 쳐다봤다.
반짝이는 눈빛에 잘 먹어서 그런지 뺨도 홍조가 어려 있다.
입가에는 친절한 미소가 감돌지만 지나치진 않다.
젠장...
확실히 좀 잘생기긴 했다.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그보다 딱히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불과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로드리고도 딱히 못난 곳은 없다.
그래도 어딘지 마음속 한 구석에선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한차례 이를 악물고 화를 참아보지만 도무지 치고 올라오는 울분이 다스려지질 못한다.
결국 그는 입에 물려 있던 빗장을 열고 말았다.
“야! 그런 건 왜 받아? 방금 밥 먹고 왔으면서! 너 돼지 되려고 그러냐? 응? 너 지금도 그렇게 날씬한 거 아니야. 지금부터 잘 관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해요. 알아? 뚱뚱한 여자 좋아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거든! 평소에 귀엽다, 예쁘다 해도 다 소용없는 짓이야. 막상 결혼해야 할 때 되면 결국엔 날씬하고 예쁜 애한테 가게 되어 있다니까! 넌 돈도 없고, 부모도 없고, 다리도 이 모양이고...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나마 예쁘진 않더라도 뚱뚱하진 말아야지. 이게 다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새겨듣고. 알았지?”
“되..됐어요! 혼자 살면 혼자 사는 거지...”
낸시는 입을 살짝 내밀며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호~낸시야, 그 불쑥 튀어나온 입술은 뭐니?
그건 저 있어 보이는 놈한테 조금이지만 마음이 있었다는 말이니?
로드리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목발이나 받자.”
로드리고는 에린 크레이머를 향해 한차례 눈을 부라리고는 공방의 주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에린 크레이머가 입을 열었다.
“목발?”
의아함이 담긴 어조다.
그의 시선은 로드리고를 향했다가 그 다음에는 비욘느와 제이미경 쪽으로 움직인다.
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공방으로 목발을 찾으러 온다고 들었다.
그럼 이 어린애가 오늘 겨뤄야 하는 상대란 말인가?
그는 의문을 담은 눈으로 다시 꼬마를 쳐다보았다.
로드리고는 에린의 시선을 받으며 띠껍게 노려보았다.
뭐야? 이번엔 나한테 작업 거냐?
옷차림이 절대로 일반 평민은 아니라 대놓고 욕설을 날릴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눈을 내리깔고 겁먹은 개가 되기도 싫었다.
하지만 로드리고의 이런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에린은 금세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하하...그럴 리가 없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로드리고는 에린의 그 중얼거림에 기분이 더욱 엉망이 되는 걸 느꼈다.
에린의 시선에서 로드리고는 보았다.
높은 곳에 선 자의 오만함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더 이상 여기서 왈가왈부 떠들어서 어쩌자는 거야?
그냥 가자.
시선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굳이 투닥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대로 낸시를 데리고 저 놈에게서 멀어지면 될 뿐이다.
목발 받아서 돌아가는 길에 낸시한테 저놈 욕이나 한가득 해주어야지.
저렇게 생긴 놈은 얼굴뿐이니까.
자고로 남자는 나 같은 남자를 만나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나 로드리고가 자리를 뜨기 전에 비욘느가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 왜 싫은 건데? 너 잘 싸우잖아?”
가뜩이나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새끼 때문에 열 받는데, 이 미친 계집애가 정말 왜 이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거야?
잘 싸우면 다 칼 들고 설쳐야겠냐?
그럼 옆에 있는 잘 싸우는 제이미경한테 그 새끼 반쯤 죽여 달라고 하면 될 것 아니야?!
왜 자기 옆에 있는 칼잡이는 안 쓰고 나한테 징징거리는 거냐고!?
노인네는 아끼느라 안 되냐?
뒷일 신경 쓰지 말고 꼴리는 대로 쓴 소리 한번 해봐?!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있는 집 계집애 괜히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도 없지.
그냥 적당히 넘기자. 적당히.
“전 약한 사람하고는 싸우지 않습니다.”
분명 비욘느를 향해 말했지만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지? 레이디 비욘느, 혹시 내 상대라는 게 이 꼬마를 말하는 거요?”
에린 크레이머는 어이없다는 듯, 아니 급기야 나중에는 화가 난다는 듯 비욘느를 다그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엉뚱한 곳에서 대답한다.
“뭐요?! 비욘느라고?! 누가?! 설마...?!”
로드리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에 서있는 여자 아이를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왜 쟤가 비욘느라고 불리는 거야?!
잠깐...잠깐만...생각해보니 나이는 대충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정말 비욘느?
혹시 동명이인 아니야?
비욘느는 로드리고의 반응에 먼저 답해줬다.
“뭐가 잘못됐어? 내 이름, 비욘느 브라우닝. 딱 봐도 귀족이잖아?”
그게 귀족이긴 하지만...
분명 귀족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옷차림뿐이고!!!
네가 어디가 비욘느 브라우닝이란 말이냐?!
예쁘고 우아하고, 우수에 젖어있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상냥한 마음...
전부 어디 가버렸는데?!
“대체 왜 그래?”
비욘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힌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에린 크레이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레이디 비욘느! 설마 나를 이런 애송이와 붙게 할 생각이었단 말이요? 뭐, 아버님들의 의중을 헤아려 간단히 혼약을 받아들이려는 의도였나본데 그래도 이건 아니요! 이건 내게 있어 모욕이란 말이요!”
...모...모욕?!
이 새끼 대체 뭐라 지껄이는 거냐?!
나랑 뭘 하는 게 모욕?
정말 빡치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려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속으로 ‘개XX’를 열심히 중얼거려본다.
그때, 비욘느가 말했다.
“모욕은 무슨 모욕이요? 정말 강하단 말이에요! 당신 같은 사내는 10명이 덤벼도 소용없을 걸요?”
흠흠...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10명은 좀 많지 않나?
조금 겸손하게 9명쯤으로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로드리고가 혼자서 심각한 표정으로 오줍지않은 겸손을 떨며 9명으로 마음속에서 인원을 줄이고 있는 동안 에린 크레이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눈부신 검신이 들어난다.
명검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꽤 품질이 좋은 검이다.
게다가 애정을 들여 신중하게 관리를 해온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여기서 겨뤄보도록 하지요. 레이디께서 극구 칭찬하는 그 실력을 제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에린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의 검이 로드리고를 향했다.
하지만 로드리고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왜 지 마음대로 결정하고 지랄인데?
“그리고 약한 자와는 붙지 않는다는 그 건방진 말을 믿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도록 하겠네.”
그렇게 로드리고는 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에린이 검을 휘두르며 짓쳐들어왔다.
결국 그대로 있으면 몸 어딘가에 칼침을 맞게 생겨 어쩔 수 없이 로드리고는 몸을 움직여 피했다.
가볍게 한걸음 물러서자 꽤 매서운 소리를 내며 휘둘려지던 에린의 검은 로드리고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에린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곧바로 검을 반대방향으로 휘두르며 다시 로드리고 향해 연속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로드리고는 다시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공격을 몸을 비틀어 피했다.
‘휘이잉~’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친다.
단 두 번의 간단한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걸 에린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에린은 오만한 표정을 버리고, 두 걸음 물러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로드리고는 에린이 자세를 다시 잡는 중에도 딱히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꽤 화가 나 있었다.
만약 로드리고가 실력이 쥐뿔도 없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술 말고는 솔직히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괜히 귀족이 분명한 놈을 때려주고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젠장...어쩌라는 거야?
이게 다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저 비욘느 때문이야!
정말 비욘느 브라우닝이란 말인가?
지금도 생글거리며 로드리고와 에린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비욘느를 흘끗 쳐다보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