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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17화 (117/200)

00117  결투  =========================================================================

“힘내! 멋진 모습 보여줘!”

자기를 비욘느라고 주장하는 계집애의 응원을 듣는다.

그래도 전혀 기쁘지 않다.

낸시는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내게 가자는 눈짓을 한다.

나도 가고 싶다.

하지만 저 미친놈이 이대로 보내줄 것 같지 않다.

어쩔 수 없나?

쓰러뜨리고 가야 할까?

원한 갚는다고 뒤에서 칼침 놓는 건 아닐까?

밤에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건 너무 앞서나간 생각일지도...

하아...까짓 거 멋진 로드리고님의 모습을 보여주자.

결국 로드리고는 단검을 꺼내들었다.

검집을 빠져나오며 그다지 스르릉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좋은 검은 아니었다.

그냥 쓸만한 검 정도는 될까?

어쩌면 그것도 안 될지 모른다.

에린이라 불리는 저놈의 검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다.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도 어딘가 안쓰러워 보이고, 길이도 영 시원치 않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가 나간 곳은 없었다.

오늘 이때까지 이 검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저놈과 비교하면 자꾸만 하찮아져 보인다.

젠장...이런 마음은 조셉과 자신을 비교할 때 말고는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입맛이 쓰다.

눈살을 찌푸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것이 네가 쓰는 무기인가?”

에린이 물었다.

뭐라는 거야? 저 병신은?

그럼 자기 품에서 남이 쓰는 무기를 꺼내서 들겠냐?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이번엔 제대로 가지.”

놈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거리를 빠르게 좁히며 다가왔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하겠다고 말하고선 이번에 제대로 가겠다는 놈의 저의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로드리고는 곳곳에 놈의 허점이 보였다.

간단히 고개를 숙여 검을 피하며 단검을 박아 넣으면 끝낼 수 있다.

아마 눈 깜박할 정도의 시간이면 놈은 개처럼 바닥을 구르며 깨갱거리고 있겠지.

그래도 그렇게 해선 안 된다.

놈은 입을 열면 ‘모욕’이란 말을 더럽게 많이 하는데, 이번에도 분명히 모욕이라고 발광할 것이 분명하다.

놈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상대해 주어야 한다.

일단 놈이 휘두른 검을 단검으로 막았다.

그래도 전력으로 막았다간 틀림없이 단검이 이가 나갈 수밖에 없어서 빗겨 막으며 물러섰다.

하지만 놈은 이걸 기회로 생각했는지 그대로 검에 더욱 힘을 주어 로드리고를 압박했다.

로드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미끄러지듯 에린의 검을 마주한 채 그대로 에린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어깨로 한차례 치고 물러났다.

그 행위에는 ‘내가 너 봐주고 있는 거다.’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절대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자가 할 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래도 로드리고는 이정도 경고는 해주고 싶었다.

봐주는데 그걸 기회로 허튼짓을 해버리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에린은 가슴에 받은 충격이 꽤 컸는지 뒷걸음질 치고 나선 연신 기침을 해댔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미경이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비욘느는 눈을 빛내며 로드리고의 선전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봤지? 정말 대단하지 않아?”

“이미 결과는 정해진 일, 다만 에린 공자가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면 당연히 실망하지. 제이미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그게 내가 바라는 일인데 너무 실망하지 않으면 이런 일을 벌인 의미가 없잖아?”

“아가씨!”

“됐어! 제이미경이랑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하아...”

하지만 이런 둘의 대화는 로드리고와 상대하고 있는 에린에겐 전혀 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에린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에린은 자신의 본 실력을 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고 있다.

이미 기사의 작위를 받은 사내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 그로서도 억울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자기보다도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소년일 뿐이다.

실력에 있어 자격지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이 훈련하고 있는 동료 기사들의 경우에 해당할 뿐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훈련해온 기간도 다르다.

적어도 이런 어린애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에 의구심이 들 거라곤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이젠 기침은 멈췄지만 아직도 가슴엔 통증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통증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정말...천재란 말인가?

제이미경을 상대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커다란 벽이 앞을 가로 막은 것 같은 기분이다.

어쩌면 제이미경이 자신을 봐주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이미경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정도 실력은 본인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든 착각에 불과하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대체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매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검을 휘둘렀다.

더 이상의 노력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더 어린 누군가에게 실력의 격차를 느끼고 있다.

나는...나는...

에린 크레이머의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지는 걸까?

딱 봐도 정상이 아닌 에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드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또 왜 저러는 걸까?

한 대 맞았다고 지금 열 받아서 저러는 거야?

새끼가 아주...칼침 한 번 놓으면 눈깔 뒤집히겠네.

지는 아주 사생결단 낼 것처럼 나한테 칼을 휘둘러 댔으면서 내가 한 대 때리니까 그건 또 용서 못하는 거냐?

저거 아주 나쁜 새끼 아니야?

아무튼 이쯤에서 그만 두어야겠다.

나도 계속 하다간 열 받아서 한두 방 쑤실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착하고 선량한 나라도 한계가 있어.

로드리고는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에린을 향해 로드리고가 말했다.

“실력이 뛰어나서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이쯤에서 그만 두죠.”

로드리고는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에린은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여전히 검을 쥔 손을 떨며 로드리고를 노려보았다.

로드리고는 그 시선을 받고 나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새끼,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잖아?

뭐 저딴 새끼가 있냐?

눈으로 사람 죽일 수 있으면 벌써 골백번은 죽었겠어.

나 참 어이없어서...

누가 지보고 싸우자고 했나?

지가 덤벼들어서 어쩔 수 없이 상대해주었더니...

검도 집어넣을 생각을 않고...

로드리고는 눈 딱 감고 개 값을 물어줘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에린 크레이머도 검을 집어넣었다.

“넌 누구냐?”

착 가라앉은 음울한 목소리로 에린이 물었다.

처음 봤을 때 보여주었던 옅은 미소로 빵을 내밀며 낸시에게 수작을 걸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로드리고는 그 모습을 보곤 낸시를 찾아 시선을 맞추었다.

분명히 눈으로 ‘거봐! 이 새끼는 얼굴밖에 없다니까. 지금 삐져서 이러는 거 너도 보이지?’하고 말했지만 낸시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튼 로드리고도 뭐라 적당히 답해주어야 했기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 봤지만 그다지 해줄만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비욘느가 끼어들었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천재 검사지! 에린 크레이머 공자 같은 사람은 10명이 덤벼도 질 수밖에 없는 그런 천재 검사! 그렇지? 응?”

비욘느가 눈을 반짝이며 로드리고의 답변을 재촉했다.

로드리고는 얼떨결에 말했다.

“그...그런가? 하..하하..뭐...”

에린 크레이머는 주먹을 꽉 쥐며 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소! 승부를 미뤘을 뿐이지.”

“호호!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지지 않았다고? 정말?”

비욘느는 똑바로 에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에린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나는....아직 지지 않았소!”

“오호호! 아하하하하!”

비욘느는 통쾌하다는 듯 웃어댔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아도 비웃음에 불과했다.

로드리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비욘느를 쳐다보았다.

저게 정말 비욘느란 말인가?

아무리 아직 어리다지만...

정말 정떨어지는 계집애네.

아무튼 그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에린이란 저 새끼, 빡치면 졸라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 같던데...저러다 뭔 짓 할지 알고...

로드리고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슬쩍 겁이 났다.

그럼에도 비욘느는 도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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