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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18화 (118/200)

00118  결투  =========================================================================

가슴 속 한가득 쓰라린 실망감을 간직한 채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런 여자를 한평생 가슴에 품고 그리워하며 인생을 허송세월했단 말인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제대로 된 추억도 만들지 않고서?

오랫동안 품어온 가슴속 추억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현실이 아름답지 못하단 사실을 알았을 때, 느끼게 되는 슬픔은 커지게 마련이다.

비욘느의 비웃음은 어디까지나 에린을 향해있지만 로드리고도 덩달아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빛이 바래버리는 추억 속에서 씁쓸해하던 로드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비욘느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녀의 우아함도, 따스함도, 아름다움도, 그리고 그 친절함과 배려심도 사라진 것이 아니야.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의 깊은 곳에 아직 잠들어 깨어날 순간을 기다리는 거지.

원래 사람은 뭔가를 경험하며 차츰 변해가지 않던가?

그가 애써 비욘느를 두둔하며 지나온 과거의 가치를 가까스로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로드리고의 눈에 입술을 깨물며 적개심과 울분이 가득한 에린 크레이머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드리고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새끼가 곧 비욘느에게 덤벼들 거란 사실을 말이다.

지금도 공간을 가득 매운 어린 소녀의 비웃음이 에린 크레이머의 분노 게이지를 사정없이 채우고 있지 않은가?

이제 곧이다.

로드리고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고 에린이 비욘느에게 달려들 때, 멋지게 막아서며 그를 넘어뜨려야 할까?

아니면 지금 비욘느의 비웃음을 멈추고, 애초에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게 말아야 할까?

아마 비욘느에 대한 그의 애틋함이 여전했더라면 그는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비욘느의 마음을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그에게 유익한 것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로드리고에게 남은 것은 그런 애틋함이 아니었다.

그저 과거에 대한 빛바랜 추억일 뿐이고, 다시 한 번 그녀가 그때의 훌륭한 여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욕심이었다.

그래서 로드리고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소리쳤다.

“그만!!!”

순간 공간을 가득 채웠던 소녀의 거슬리는 비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로드리고를 향했다.

로드리고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에린 크레이머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이자는 훌륭한 실력입니다. 그렇게 비웃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시절부터 밤낮 가리지 않고 검을 휘둘러온 겁니다. 손에 몇 번이고 물집이 생겨도...또 그것이 터지고, 다시 굳은살이 되고, 다시 터지고...그래도 멈추지 않은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에게 졌다고, 이자의 그 노력이 헛수고였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그것을 비웃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짓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이나 창피한 말이었다.

말을 하고 나니 부끄러워져 후회가 밀려왔다.

아...젠장...괜히 말했나?

영 기다려도 사람들의 반응이 없자 그의 창피함은 갈수록 크기를 키웠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한참만에야 비욘느가 반응을 보였다.

“나...나는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여기서 기회를 놓치면 지금 그녀가 느끼는 모든 창피함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로드리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비욘느 아가씨께서 그런 의도를 가지셨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말실수를 했을 뿐입니다.”

로드리고가 시선을 슬쩍 돌려 에린을 살피자 그의 분노로 끓어오르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튼 저자식이 빡쳐서 뭔가 끔찍한 짓을 벌일 일은 막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에린의 시선이 이상했다.

로드리고를 쳐다보는 시선에 뭔가 열망 같은 것이 엿보인다.

저 반짝이는 눈빛 대체 뭐냐고?!

왜 사내놈이 날 그렇게 쳐다보는데?

뭔가 신변의 위험 같은 것을 느끼며 로드리고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린 크레이머는 로드리고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의 배려 잊지 않겠다.”

로드리고는 에린의 예기치 못한 말에 답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 거리다 말했다.

“뭐...뭘요.”

“아니. 신세를 졌다. 그리고 너 같은 실력자가 내 노력을 그렇게 높이 쳐주었다는 사실이 내게 큰 힘을 주는군. 네 말대로다. 물집이 굳은살이 되고, 다시 물집이 되고...끝도 없이 반복될 뿐이지.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버티고 다시 버텼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날 서게 만들었지. 처음 너의 말을 듣고 널 굉장히 오만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넌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였겠지. 그런 네가 약한 녀석 따위를 상대하기 싫다는 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로드리고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이 새끼 너무 띄워주는 것 아니야?

고작 한 달 검의 신전에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새끼 아무래도 날 죽인다고 지랄 발광할 것 같아 무섭다.

“너의 스승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나?”

“황혼의 기사라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황혼의 기사? 처음 듣는 군. 난 대륙 10강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제이미경이 끼어들었다.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자신의 신분을 숨겼을지도 말이야.”

“그렇군요. 확실히...”

“이봐, 에린 공자. 자네는 정말 잘 싸웠네. 이 소년에게 진걸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나도 졌으니까 말이야.”

“정말입니까?!”

에린 공자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나? 사실이라네. 내가 전에 말했던 ‘천재’라는 말을 이제는 이해하겠나?”

“...예.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요.”

에린은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쯤에서 그만 몸을 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로드리고가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목발을 찾으러 왔을 뿐이니까요.”

그가 시선을 돌려 낸시를 쳐다보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에린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혹시 바쁘지 않다면 우리와 함께 성으로 가주지 않겠나?”

“성이요?”

“그래. 자네와 실력을 겨루려 했던 건 사실 사정이 있어서였네. 레이디 비욘느가 자네와 겨뤄서 이긴다면 나와의 혼약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기 때문이지. 난 그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그럼 뭐야?

비욘느는 결혼하기 싫어서 나랑 이 놈을 붙게 했다는 말인가?

뭐, 벌써부터 누구랑 결혼해야 한다고 집에서 강요하면 이런 일을 벌인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난 자네를 데려가서 아버님께 내가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드리고 싶네.”

“그리고 혹, 그분이 인정하지 못하시면 저와 다시 한 번 겨루고요?”

“돌려 말하지 않겠네. 그분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쉽게 수긍하지 않으시니까. 부탁하네.”

에린이 선뜻 로드리고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조금 전까지 죽이겠다고 검을 휘둘러대던 놈이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나오자 로드리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성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괜히 높은 사람들을 만나 주눅 들어 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막 거절하려는 순간, 비욘느가 말했다.

“그래. 성으로 와. 처음부터 대결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하기로 했었으니까. 네가 와야만 해.”

“그렇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요.”

로드리고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있지도 않은 핑계를 댔다.

그렇지만 좀처럼 있는 집 자식들은 대체로 마이 페이스가 강해서 쉽사리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그럼 기다리지 뭐. 마차를 타고 가면 볼일은 금방 볼 수 있을 거야.”

“아니...아니요.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신세라니! 그렇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부탁하고 있는 거니까 부담 갖을 것 없어.”

부담이 안 되긴 뭘 안 되냐?!

너희들이야 코흘리개들이지만 성에는 닳고 닳은 귀족 놈이 있을 텐데 부담감 백배라고!

이럴 때,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낸시에게 시선을 주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우와~! 그럼 저 성에 가는 거예요? 정말요?”

마치 꿈꾸는 소녀 같은 표정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포개 잡으며 낸시가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다.

로드리고는 그 모습에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니, 하지만 바쁜 일 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 바쁜 일 없잖아요?”

이 계집애가 오늘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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