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결투 =========================================================================
로드리고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마차라면 그도 익숙한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짐마차에 한정되었을 뿐, 이런 고급스런 마차는 앉아있는 것조차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낸시도 곁다리로 마차에 같이 타고 가며 그 내부의 호화스러움에 두리번거리길 멈추질 않는다.
그것이 못내 창피해 로드리고는 헛기침을 해보지만 낸시는 그가 기침한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대체로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로드리고를 향하고 있었다.
물론, 로드리고도 눈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걸 인지했다.
각자 그를 쳐다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랐는데 가장 부담되는 시선은 뭐라 해도 에린의 시선이었다.
남자가...그것도 꽤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가 선망어린 표정을 짓고는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는 미소를 그리고 있다.
뭔가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뎠다간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체 저 새끼 아까 먹은 빵이 체하기라도 했나 왜 저러는 거야?
그러게 뭐 먹고 갑자기 움직이면 안 되는데...높으신 분들은 그런 간단한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지...
애써 에린의 시선을 무시하며 로드리고는 다른 시선을 살폈다.
그나마 비욘느의 시선은 조금 대하기가 편했다.
뭣보다 여자애고, 한때 가슴 콩딱이며 심쿵하던 상대이지 않던가?
게다가 어쩌면 ‘한때’라는 표현은 좀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가 기억 속에 간직했던 이미지와 꽤 큰 갭이 있어서 생기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미모는 상당한 편이다.
아직 어린앤데도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확실히 옆에서 촌티 팍팍 내는 낸시와는 차이가 컸다.
그녀의 시선은 꽤 미묘한 것이었다.
호감인지 아니면 적대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대개는 어린애들의 감정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아닌 이상 표정에 감정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일반적인 경우로 보기 힘들었다.
그건 실제로 그녀의 시선에 몇 가지 감정이 섞여 있어서 명확히 하나로 정의할 수 없어서였다.
로드리고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참동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맑은 눈과 붉은 입술, 둥근 이마와 오똑한 코.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확실히 여기엔 존재하고 있었다.
통통한 볼은 차츰 나이를 먹어가며 갸름하게 변해 가겠지.
아련한 추억에 잠겨 로드리고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뭐라 하던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비욘느다.
내가 평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가슴 설레였던 소녀인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비욘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드리고가 깜짝 놀라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딱히...책망하는 건 아닌데...그냥 계속 쳐다보니까...궁금해서 묻는 것뿐이야.”
비욘느는 눈을 내리깔며 쭈뼛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게...그냥...쳐다봤습니다. 뭐...예쁘고 귀여우면 자연히 시선이 가니까요.”
로드리고는 지금의 비욘느를 보며 딱히 욕정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지금의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여인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으니까.
그는 그저 흔적을 통해 추억을 엿봤을 뿐이다.
그래서 로드리고 또래의 사내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절거릴 수 있었다.
그저 적당히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받아들이는 비욘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적당히’가 아니었다.
뭐...뭐라는 거야?!
비욘느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누군가에게 대놓고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 지긋한 제이미경이나 가족 정도였다고 할까?
이렇게 자기 또래의 사내아이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게다가 혼자 있는 상황에서 들은 것도 아니고, 주변에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것이 말로만 듣던 구애일까?
하지만...나하고 혼담이 오가고 있는 에린 크레이머 공자가 여기 있는데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완전히 짐승이 따로 없어.
그...그렇지만 싫지는 않아...
나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이런 건 생각해 본적도 없었는데...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이미 신경을 꺼버린 로드리고는 역시나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제이미경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오늘 제가 원래는 상당히 바쁜 일이 있는데 이렇게 성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점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제이미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로드리고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하하!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요. 그게...아무래도 제가 거기에 갔었더라면 꽤 돈을 벌었을 텐데...아무래도 상응하는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순간 제이미경의 볼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그렇군. 확실히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그렇다면 얼마나 손해를 본 건가?”
로드리고는 눈알을 요리조리 굴려가며 적당한 금액을 생각해 보았다.
“2...2 골드 정도?”
“호~! 꽤 큰 금액이군. 하지만 왜 의문형인가?”
제이미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로드리고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 이 늙은이는 왜 꼬투리는 잡는데?!
그냥 주면 될 걸 가지고!
“하...하하...그게 정확한 액수는 가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거든요.”
간신히 수습했다고 생각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려는 찰나 제이미경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렇군. 확실히 가보지 않으면 세상일이란 게 알 수가 없으니까...”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 구나.
늙은이 그래, 그렇게 서로 이해해 주는 밝은 사회를 살아야지.
그렇지 않겠어?
하지만 안심한 로드리고의 귀에 다시 난처한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2골드나 벌게 되는 그 일이란 게 대체 뭔가?”
“......”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입술은 뻐끔거리지만 도무지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머리는 텅 빈 것처럼 공허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수난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맞아요. 도련님. 무슨 일인데 2골드나 버는 거예요?”
낸시 이 망할 계집애야?!
너는 촌티 풀풀 날리며 마차나 두리번거리란 말이야!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얼마나 너한테 잘 해줬는데 네가 이렇게 배신 때리면 안 되지!
하지만 그의 심정이야 어떻던 낸시는 맑은 눈으로 로드리고를 쳐다볼 뿐이다.
“비밀이야.”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마차의 흔들림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젠장...
돈 좀 조금 벌어 보려고 했다가 완전 쪽 당했네.
너무 많이 부른 걸까?
나쁜 늙은이, 그냥 좀 넘어가지.
그냥 돈 좀 달라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면박을 주다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잖아?
이럴 때는 그냥 ‘아! 그렇군요! 이거 정말 죄송! 그러니 사과하는 의미로 자! 5골드!’하는 것이 관례 아니야?
눈치 없는 낸시 계집애도 그래.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러는 거냐?
같이 여행하며 드는 돈은 땅 파면 나오는 줄 알고 있나?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든 불려야 할 것 아니냐고!
답답하다.
정말 답답해.
속으로 열심히 ‘씨발, 씨발...’을 외치며 툴툴거리던 그의 귓가에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밀이라면 어쩔 수 없군.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너무 파고드는 것도 실례일 테니 말이야. 내가 고집을 부려 이렇게 오게 되었으니 그 금액은 내가 대신 보상하도록 하지.”
에린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품을 뒤져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리곤 금화를 5개 집어서 로드리고에게 건넸다.
“받게. 아무래도 2골드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서... 주제넘은 짓이지만 거절하진 말게.”
로드리고는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낚아채선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거 에린 이 새끼, 아무래도 될법한 놈이네.
뭘 해도 하겠어!
암! 아주 훌륭해!
눈에 가득 힘을 주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로드리고가 입을 열었다.
“주제 넘는 짓이라니...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하하하! 그리고 보니 에린 공자님의 검은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절도가 있고, 날카로워 겨루는 와중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검을 견식 할 수 있어서 저에겐 아주 큰 영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에린을 향해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던 로드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간이나 쓸개라도 빼어줄 듯한 표정으로 연신 파리처럼 손을 비벼댔다.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은 에린의 기분을 무척이나 좋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