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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20화 (120/200)

00120  결투  =========================================================================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에 도착했다.

조금 투박하지만 웅장함은 꽤 그럴 듯 했다.

로드리고와 낸시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낸시는 공방에서 받은 목발을 짚고 움직였다.

조금 위태로워 보였지만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휘청거릴 때마다 로드리고가 투덜거리며 부축해준다고 말했지만 낸시는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그렇게도 꿋꿋 하려고 애쓰던 낸시도 막상 응접실에 들어서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곳이 익숙하지 못한 건 로드리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는 전쟁 중에 수도의 왕성에 들어가 본적이 있었다.

내전으로 여기저기 파괴된 곳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웅장함고 화려함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낸시처럼 당황스럽고 놀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로드리고는 두리번거리며 눈을 빛내는 낸시를 바라보자 장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비욘느 일행은 로드리고와 낸시를 응접실에 남겨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되었다.

벌어진 낸시의 입에 자기 손가락을 빠르게 집어넣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들자면 거기에 벌어진 낸시의 입이 있었기 때문이랄까?

세상엔 상대방이 만만하고, 그 대상이 입을 벌리고 있으면 손가락을 집어 넣어보는 사람과 꾹 참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로드리고는 전자에 해당했을 뿐이다.

물론, 낸시는 손을 내저으며 로드리고를 밀어냈다.

“뭐에요?!”

낸시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질책하듯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씨익 웃고는 어깨를 잠시 들썩였을 뿐이다.

“아유~! 정말...”

“야! 그 반응은 뭔데?”

“됐어요!”

“되긴 뭐가 됐는데? 응? 응?”

로드리고는 낸시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계속해서 의문부호를 날렸다.

그러자 낸시가 온몸을 움찔거렸다.

“그만 해요!”

정말로 화가 났는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뭘 정색을 하고 그래? 그냥 장난치는 걸 가지고?”

“저는 싫단 말이에요! 이러는 거 정말 싫으니까 하지 말아요. 하나도 재미 없어요.”

“하지만 난 재미있는데?”

그러면서 로드리고가 다시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낸시의 옆구리 주변을 기웃거리자 낸시는 서둘러 로드리고의 두 손가락을 꽉 움켜잡고는 꺾어버렸다.

우두둑!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뇌리를 강타하는 통증에 로드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낸시도 로드리고의 반응에 놀랐는지 얼른 손가락을 잡았던 손을 놓았지만 로드리고의 손가락은 이미 절대로 휘어지지 않을 것 같은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모...몰라! 그러게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낸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서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로드리고의 화를 더욱 부채질 했는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소리쳤다.

“씨..씨발...미친 계집애!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내 손가락 어떻게 할 거야?! 아우~~~! 아파...진짜...진짜 아프단 말이야. 아...정말 어떻게 해....아...진짜...하여간 그냥 장난친 건데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하냔 말이야?! 너..나 모르게 운동했냐? 응? 이거 도무지 보통 여자애 악력이 아니야! 나보다 훨씬 센 것 같은데? 아주 작정하고 오늘을 노린 거 아니야?”

“그...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보니까...”

“어쩌다보니까 도련님 손가락을 부러뜨렸어?!”

“그..그게 아니라...”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비명소리가 들렸는데...”

“제 손가락이요! 아우...아파...의사 불러줘요. 아...젠장...”

로드리고가 말하는 와중에도 낸시한테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낸시도 억울했는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그 정도는 아니에요.”

로드리고는 턱을 늘리고 고개를 휘휘 돌리며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네가 알아!? 응?!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아냐고?! 아우~! 진짜! 네 손가락도 한 번 해볼까? 응?!”

“......”

결국 낸시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그제야 만족했는지 로드리고는 시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중상이니까 방 좀 하나 잡아줘요. 편한 방으로요. 침대 폭신하고 넓은 방으로. 그리고 남향이면 좋겠는데....창도 크고, 한눈에 시내가 들어오는 그런 방 있죠?”

“화..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로드리고는 응접실에서 침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의사가 곧 달려와 로드리고를 진찰했는데 그는 유심히 살피다가 로드리고에게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별 생각 없이 눈을 감고 나자 의사가 로드리고의 손가락을 잡고 휘어진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었고, 다시 한 번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드득~

물론 로드리고는 비명을 지르곤 의사를 돌팔이라고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의사가 들을 정도로 크게 말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단다. 하지만 꽤 심하게 삐었어.”

그 말을 듣고 로드리고는 찌릿한 시선으로 낸시를 노려보았다.

낸시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뭐라 불만을 호소하지는 못했다.

의사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손가락보다 조금 긴 막대기와 붕대를 꺼내더니 로드리고의 손가락에 부목을 대주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아주는데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는 ‘아이고~’나 ‘아야!’같은 추임새를 잊지 않았다.

의사도 로드리고의 그런 반응에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의사와 시종이 방을 나서자 로드리고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낸시를 쳐다보았다.

“야!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뭐..뭘요?”

“정말 몰라서 물어?”

“하지만 도련님이 자꾸 싫다는데 장난치니까...”

“오호라! 너 지금 이게 전부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런 말은 아니지만 도련님도 잘못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손가락이 부러져도 싸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부러지지 않았다고 그랬잖아요?”

“아니야. 확실히 부러졌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이건 부러진 거야.”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무슨 소리에요?! 고집도 정도껏 부려요!”

“고집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아무튼 네 의견은 잘 알았어. 그러니까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는 거지? 내 손가락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말이지?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이것만은 잘 새겨 둬. 난 절대로 오늘 일을 잊지 않겠어. 평생 가슴에 간직할거야.”

“그런 건 그냥 잊어요. 평생 기억해서 뭐하려고요?”

“글쎄? 복수라든가...뭐 그런 거 있지.”

“그래서 지금 손가락 삔 것 때문에 저한테 복수하겠다는 말씀이세요?”

낸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로드리고도 되는대로 주워섬기기는 했지만 그대로 그렇다고 말했다간 아무래도 값없는 사람으로 평생 기억될 것 같아 잠시 생각해 보곤 말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복수하겠다는 건 아니야. 아무튼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곤 낸시가 앉아 있는 반대 방향으로 휙 돌아누워서는 등을 보였다.

그 모습 자체에서 이미 값없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음을 로드리고는 모르는 걸까?

아무튼 낸시는 조금은 처량해 보이는 로드리고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도련님, 많이 아파요?”

“...응.”

“제가... 미안해요.”

“흥...그래도 잊지 않을 거야. 이미 늦었어.”

“......”

결국 낸시도 말을 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날, 로드리고는 브라우닝 자작을 만날 수 없었다.

그가 손가락을 다친 것을 알자, 제이미경이 자작에게 사정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작과 남작 앞에서 하기로 예정되었던 에린과의 결투는 하염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비욘느와 에린, 그리고 제이미경이 방을 찾아왔었는데 그들 앞에서는 로드리고도 체면을 생각했는지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낸시와 둘만 남게 되면 마치 자기의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하게 엄살을 피웠다.

식사가 방으로 배달되어 왔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낸시에게 먹여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며칠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직 손가락이 완전히 나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가만히 침대에만 누워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물론, 간간히 잊지 않고, 낸시를 놀리며 재미를 보긴 했지만 그것도 계속하다보니 식상할 뿐이었다.

낸시는 목발을 짚고 꿋꿋이 로드리고의 수발을 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낸시가 훨씬 중병으로 보였지만 그녀는 딱히 불평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가슴 속에 고이 묻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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