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1 결투 =========================================================================
로드리고는 자기 검지손가락을 찬찬히 살폈다.
옆에선 낸시가 사과를 깎으며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으음...붓기는 많이 내린 것 같은데...”
낸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아파...”
낸시가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입을 열었을 뿐이다.
“그런데 마을엔 언제 돌아가는 거예요?”
“마을?”
“우리 마을이요!”
“아~! 마을...그래...가야지. 마을...그래도 지금 딱히 불편한 거 없잖아? 그렇지 않아?”
“그런 건 없지만 여긴 우리 집이 아니잖아요?”
“야, 마을에 가도 똑같아. 너는 어차피 하루나 이틀 뒤에 다시 알지도 못하는 집에 가야할걸?”
“그래도 가야지요. 주인님과 마님이 걱정하신단 말이에요.”
“누가 안 간다고 그랬냐? 가긴 가는데 좀 쉬다가 간다는 거지.”
“많이 쉬었잖아요?”
“이 손가락 안보이냐? 아직도 아프다니까. 너 그렇게 보채는데 엄밀히 따지면 너만 안 그랬으면 마을엔 가도 벌써 갔어! 굳이 누구 탓이냐를 따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따지면...알지? 누구 때문이지?”
“그럼 얼마나 더 쉬어야 가는 건데요?”
“글쎄...한 두어 달쯤이지 않을까?”
“무슨 두어 달이요?! 저도 그렇게는 안 쉬었거든요!”
낸시는 자기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너랑 다르게 몸 구조가 섬세하게 되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
“뭐가 어쩌고 어째요? 섬세?!”
“그렇지. 난 고귀하잖아?”
“고귀한 분들은 문 열고 나가면 계신 비욘느 아가씨나 에린 공자님이죠.”
“그럼 나는?”
“도련님은 그냥....도련님이에요.”
“호오라! 너 나한테 딱 걸렸다.”
“뭐가 또 걸려요?”
“너 에린 공자한테 마음 있냐?”
“그런 거 없어요!”
“없긴 뭐가 없어? 그럼 왜 에린 공자는 고귀한데 나는 별 볼일 없다는 거야?”
“제가 언제 별 볼일 없다고 그랬어요?”
“네 어투에서 전부 알 수 있거든?”
“아니거든요.”
“넌 아무튼 에린 공자한테 마음 있는 거지?”
“그런 건 생각도 안했어요!”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딱히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전부 너를 위해서 하는 거야.”
“호호! 저를 위해서 라고요?”
낸시가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로드리고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린다.
“그렇지. 다 네가 상처받을까봐 그러는 거잖아? 그런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사람 좋아해봤자 결국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게 되어 있거든.”
“어차피 마음도 없지만 저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대체 에린 공자님이 도련님 말씀을 빌리자면 겨우 저 같은 애를 어디에 이용한다는 말씀이세요?”
“어디긴 어디야?! 그 몸이라든가...”
“몸이요?”
낸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 보니 이 계집애는 애가 생기는 것도 뽀뽀하면 생긴다고 생각했었지.
너무 깊게 들어가는 건 좀 그렇구만...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이상한 이야기만 하고 계세요. 아무튼 에린 공자님은 반듯한 분이시란 말이에요. 항상 저한테도 예의를 지키시는 걸요. 복도에서 마주쳐도 도련님께서 어떠신지 안부도 묻고요.”
“나도 너한테 예의를 지키잖아?”
“......”
그 말은 도무지 낸시도 참을 수 없었는지 주먹을 쥐고 만다.
“옴마야! 뭐하는 짓이야? 너 은근히 폭력 성향이 있어.”
“도련님은 구타 유발 성향이 있고요.”
“이게 정말 한마디를 안지네?”
“이제 엄살은 그만 부리고 제발 자리에서 좀 일어나세요.”
로드리고는 투덜거리며 입을 벌렸고, 낸시는 깎아놓은 사과를 하나 적당한 크기로 잘로 로드리고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걸 보면 로드리고가 자꾸 게으름을 피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결국 로드리고는 그 후로 3일이 더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손가락이 조금 욱신거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의사 말로는 차츰 좋아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브라우닝 자작을 만날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저녁 식사 시간에 탁자 끄트머리에서 얼굴을 봤을 뿐이었지만.
자작은 로드리고를 쳐다보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아마 비욘느나 에린이 자세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음날은 오전에 자작과 남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에린과 검을 겨뤘다.
로드리고는 사정없이 끔살해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놈이 5골드 줬던 것을 생각해서 사정을 봐주기로 했다.
몇 번 검을 주고받자 로드리고의 의도를 알았는지 에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튼 은근히 시간을 끌면서 놈을 이기자 자작과 남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야?
내가 져줬어야 했냐?
하지만 영 상태가 부실해도 비욘느는 비욘느다.
그녀가 내 눈 앞에서 다른 놈에게 팔려가듯 시집가는 건 볼 수 없다.
하지만 미안해지게 남작이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지다니! 뭐하는 짓이냐?! 에린~~~~~~~~~!”
우레가 치는 것처럼 공기를 흔들며 고함을 쳐대는데 에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저런 코딱지만한 애새끼도 이기지 못하다니! 너는 가문의 수치다! 수치야! 에이잇~!”
급기야 남작은 검을 뽑아들고는 에린에게 겨눴다.
에린의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로드리고는 눈알을 굴리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제이미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제이미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로드리고가 눈짓을 해대자 고개를 흔든다.
그래도 계속해서 찡긋거리며 나서줄 것을 종용하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남작님, 고정하십시오. 에린 공자의 실력은 손색이 없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알길 뭘 안단 말이요? 제이미경은 나서지 마시오. 이건 우리 가문의 문제요.”
“평소 존경하던 남작님께서 잘못된 일을 하시려는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무슨 소리요?!”
“후우...저 소년은 저마저 이긴 실력자입니다.”
“...뭐요?!”
남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다.
하지만 곧 시뻘겋게 변하더니 소리쳤다.
“그런 허황된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요?!”
“여러 이야기 해봤자 무엇하겠습니까? 자, 여기 그 당사자가 있고, 남작님께서도 검술의 경지가 결코 저보다 못하시지 않으니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제이미경이 로드리고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드리고는 그저 제이경에게 적당히 해서 말리라는 의미였을 뿐인데 다시 한 번 성질이 개떡 같아 보이는 아저씨와 붙게 생기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제이미경은 빠져 나간 후이고, 말리라는 제스처도 자신이 보냈기 때문에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엉거주춤 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며 남작 앞에 마주서자 남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를 악물고는 소리쳤다.
“흥! 하지만 이 소년이 몸 성히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마시오. 내 검에 오늘은 자비가 없을 터이니!”
남작이 매서운 눈초리로 로드리고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실 남작이 보기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로드리고는 에린을 실력으로 이겼다.
대체 저 어린 나이에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탄만으로 끝내기에는 그의 입장이 난처했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브라우닝 자작가와 혼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에린이 누군가에게 졌다는 소문이 돌면 그건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칠 것이 분명했다.
안된 일이지만 이참에 실력을 발휘하여 저 소년을 제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작의 검에는 처음부터 꽤 강한 힘이 실렸다.
저만한 소년이 막아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비록 에린을 이겼지만 아직 풋내기일 뿐이다.
남작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제이미경이 허황된 말을 하긴 했지만 너무 말도 안 되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로드리고를 반으로 가를 듯한 기세가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검을 빗겨 막으며 한걸음 물러서며 공격을 흘려보냈다.
남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 뭐지?
이게 아닌데...그럼 다시 한 번!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남작은 조금 전 보다 더욱 기세를 실어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방금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위태로울 것도 없다는 듯 공격을 흘린다.
그 다음도...그리고 그 다음도...
남작의 표정에 경악감이 떠올랐다.
남작을 상대하는 로드리고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자신을 죽일 듯한 기세로 누군가 검을 휘두르는 데 기분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