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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22화 (122/200)

00122  결투  =========================================================================

결국 로드리고는 남작이 흥분하여 빈틈을 보이자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높은 사람인데 피를 보게 할 수는 없어 스치듯 지나가며 발을 걸었을 뿐이다.

남작은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균형을 잡느라 몸을 뒤틀며 꽤 추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남작의 기분은 최악을 향해 치달렸다.

마침내 남작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가르친 스승도 대단한 사람이겠지만 저 놈의 재능도 놀라운 수준이야.

죽이려던 생각은 접어야겠군.

놈이 죽어버린 것을 알게 되면 스승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내가 추한 꼴만 보인 채 져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놈이 꼼짝도 못하게 할 만한 한수를 보이고, 내 승리로 이 승부를 끝내야만해.

마침내 남작은 결심했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검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미경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마나 소드를 사용하다니! 아직 어린애일 뿐입니다!”

제이미경이라고 마나 소드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남작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검에 재능이 뛰어나도 마나 소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구현을 위해선 몸 안에 충분한 마나를 축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만한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20대 후반은 되어야 발현이 가능한 마나 소드다.

절삭력을 높여 마나 소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무기를 몇 합 만에 손상시킬 수 있다.

제이미경은 아마도 남작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로드리고를 죽여 버리겠다는 심산일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소년의 실력에 화가 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말려야 했다.

막 제이미경이 검을 뽑아들고, 소년의 앞에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제이미경은 도무지 발을 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상식이 무너져 내렸다.

“세...세상에!!!!”

대체 누가 내뱉은 말일까?

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로드리고의 검도 빛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아도 마나소드가 분명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로드리고가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제대로 하는 겁니까? 원체 지금까지는 지루해서...그럼 이번엔 제가 먼저 가도록 하지요.”

그리고 로드리고가 움직였다.

그제야 남작도 정신을 차리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혔다.

지금까지 힘에서 밀리기만 했던 로드리고가 이번엔 이상하게도 힘 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작은 두어 걸음 밀려나며 자신이 지금 힘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로드리고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작님은 실력이 뛰어나시군요. 제가 조금 더 본심으로 상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남작은 고개를 내젖고 싶었지만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로드리고의 검력이 더욱 강해진다.

이를 악물며 버텨보지만 그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이미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나와 겨뤘을 때도 본 실력을 다하지 않았었다는 말인가?

대체 저 소년은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아무리 대륙 10강의 실력자라도 저런 소년을 키워낼 수 있을까?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건 그들밖에 없지 않은가?

높구나...대륙 10강이여...

일인군단이란 소리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야.

제자의 실력이 저 정도면 그들의 실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에린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몸이 떨려왔다.

이것이 전율일까?

저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아니,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처음 저 소년과 검을 마주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던 거야.

소년은 벽 따위가 아니다.

그는 산이다.

도무지 오를 수 없는 산.

아버지의 마나소드를 받아 내다니...

아니, 저건 받아내는 수준이 아니다.

아버지를 압도하고 있어.

내가 아직 어려서 기사들은 이길 수 없다고 혼자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저 소년은 그런 핑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비웃으며 저 경지까지 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해온 것일까?

내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고 그걸 뛰어 넘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로드리고는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말 보다 실력으로 말이야.

지금도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게 똑똑히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나보다 어리다지만 저런 실력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가슴이 뛰어.

그의 검을 보면 숨이 차고, 너무 가슴이...뛰어...

그렇다면 자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검술이 딱히 훌륭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보는 눈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딱히 훌륭한 실력이 있어야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절대로 속임수가 아니었다.

남작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저 땀을 보라.

저 꼬마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저 경이를 보라!

어제 저녁 보았을 때는 별 볼일 없는 꼬맹이라고 생각했다.

딸아이와 에린 공자가 짜고 데려온 꼬맹이가 분명했다.

검을 겨루는 것처럼 꾸미고, 멋지게 에린 공자가 이기고 나면 적당히 박수를 쳐준 후에 약혼식 날짜를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지?

혹시 우리 영지에 대륙 10강 중 누군가가 온 것일까?

저 소년은 그들의 제자가 분명하다.

초청할 수 있을까?

가능하겠지?

저런 소년을 혼자서 여행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이거 그런데 이러다간 남작이 지겠는데...

뭘 저렇게 끈질기게 버티고 그럴까?

누가 봐도 이미 추한 모습은 잔뜩 보였는데...

그만 깔끔하게 지고, 저 소년과 대화를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흐흐흐...대륙 10강과 연을 만들 수만 있으면 우리 영지는...흐흐흐...

남작에게 원조하기로 했던 건 전부 취소해야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대륙 10강 쪽이 더 이득이지.

그리고 잘 하면 우리 비욘느와 저 소년을 결혼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에린 공자는 저 소년에게 져버렸으니 남작이 항의조차 할 수 없겠지.

하지만...그래...비욘느...비욘느가 문제지....하아...

가만히만 있으면 정말 귀여운데...

그리고 여기 손에 땀을 쥐고 노심초사하는 소녀가 하나 더 있었다.

낸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거 도련님 맞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가락 욱신거린다고 징징거리더니...

그건 그렇다 쳐도 검에서 빛나는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물론, 제이미경과 검을 겨루는 것도 보았고, 에린 공자와 했던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적당히 상대방이 봐주면서 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저기서 남작님과 겨루는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뭔가 달랐다.

도련님은 분명 나무 막대기로 혼자서 기사 놀이를 했을 뿐인데...

설마 그 정도만 해도 저렇게 할 수 있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만약 그렇다면 나는 빨래 방망이를 얼마나 휘둘렀는데?

그럼 나는 장군이 되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구!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앗!

방금 위험했던 거 아니야?

아무튼 저런 거 그만하고, 그만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대체 저런 걸해서 뭐가 좋다는 거야

또 조금만 다쳐도 앓는 소리나 낼 텐데...

제발 다치지 않았으면...

분명 다치면 또 요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마을엔 가지 않으려고 하겠지.

하아...

그리고 그 옆에서 주먹을 쥐고,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바라보는 소녀가 하나 더 있었다.

비욘느 브라우닝.

실력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건 제이미경을 이겼을 때, 증명되고도 남았다.

에린 공자 정도는 묵사발을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설마 크레이머 남작님을 저 정도로 몰아붙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검에서 빛이 날 때, 얼마나 놀랐던가?

나도 저런 걸 배울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로드리고는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았지.

그럼 가르쳐달라고 조르면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 이것이 제이미경이 전에 내게 말했던 여자의 무기일까?

이거...굉장하잖아?

여자의 무기 굉장해!

슬슬 대결은 마무리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로드리고는 마치 호랑이가 사슴을 몰아넣는 것처럼 조금씩 남작의 숨을 조여 왔다.

남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검이 무겁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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