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결투 =========================================================================
손을 타고 충격이 전해져 왔다.
더 이상 손가락에 제대로 힘을 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검은 그의 손을 떠났다.
하늘높이 솟구쳤다가 바닥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남작은 멍한 표정이 되어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눈빛은 비어있었고, 입은 바보처럼 벌려진 채다.
끊임없이 들썩이는 그의 어깨만이 그가 아직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로드리고는 잠시 그런 남작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검을 찬찬히 살폈다.
평범한 단검이다.
다행히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검을 품에 갈무리하고는 남작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남작은 소년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같이 웃어 줄 수 없었다.
가슴 속에 커다란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허망했다.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꽤 중요한 것 같았지만 도무지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막아 놓아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혹은 위로해주지 않더라도 어깨를 빌려줄 누군가는 필요했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패자는 인기가 없는 법이다.
모두가 소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실력에 박수를 보내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혈육인 에린까지도 그곳에 있었다.
유일하게 남작에게 시선을 보낸 것은 제이미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경멸의 빛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마나소드를 사용한 것이 제이미경에게는 좋지 않게 비춰졌으리라.
한평생 아주 중요하게만 생각하며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은 더 이상 그를 지탱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보니 오래 전에 시들어버린 형편없는 나뭇가지에 불과했다.
왜 그런 사실이 지금에서야 보이는 것일까?
내가 틀어쥐려고 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튼튼하고 중요하게 보였던 것은 너무도 초라할 뿐이다.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딱히 눈물 정도는 흘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그의 곁에는 없으니까.
자작이 말했다.
“정말 훌륭한 실력이군. 자네의 스승은 누군가? 이 도시에 같이 와 있는 것이겠지? 이리로 초대하게! 내 당장 귀빈으로 대우할 테니 말이야. 하하하!”
“스승님은 여기 없습니다. 저도 한동안 사사받았을 뿐이고, 그 이후로는 뵌 적이 없으니까요.”
로드리고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어차피 뭐라 말하든 황혼의 기사를 알 길은 이 사람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안타깝군. 너무 아까워...”
자작은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대륙 10강 중 하나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무너졌으니 오죽 했을까?
하지만 그는 꿩 대신 닭이라고, 소년을 잘 대접하면 언젠가는 소년의 스승과도 연을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도 이거 기쁘기 그지없는 일일세. 자네 같은 실력을 가진 소년을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말이야. 자! 안으로 들어가지. 혹시 출출하지 않은가? 뭔가 먹을 거라도 가져오게 하겠네. 자네에 대해 말해보게나. 우리들은 모두 자네에게 많은 관심이 있으니까 말이야.”
너무 살갑게 대하는 자작의 태도에 로드리고는 조금 찜찜함을 느꼈지만 딱히 손해 볼 것은 없어서 그대로 따랐다.
자작과 로드리고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에 있던 제이미경과 비욘느, 그리고 낸시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에린만은 그제야 시선을 돌려 한편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작을 바라보았다.
평소 크게만 보이던 아버지는 더 이상 없었다.
항상 소중히 여기시던 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데도 주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잠시 주저하다가 에린은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남작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형체를 쳐다보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린...”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에린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아버지에게 건넸다.
하지만 아버지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받으세요. 검은 소중하잖아요? 그렇죠?”
남작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뭔가 말하려는지 입을 열었지만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에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멋진 대결이었습니다.”
에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남작은 왈칵 하고 그제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없이 어리고, 부족하게만 보이던 아들이 오늘은 부쩍 크고 든든해 보였다.
언제 이렇게 큰 것일까?
그러고 보면 에린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구나.
나도 어려서 아버지께 혼나며 홀로 눈물을 훔치던 때가 참 많았는데...
왜 아버지와 똑같이 에린을 대했던 것일까?
부끄럽구나.
정말 부끄러워.
남작은 고개를 돌렸다.
아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에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남작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그렇게 따뜻하고 든든할 수 없었다.
이젠 가문도, 명성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나 훌륭한 아들이 내 곁에 있다.
그거면 되는 것 아닐까?
모두 헛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상처 주는 일을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전부 헛된 것이었어.
보낼 것은 보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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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느는 제이미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작과 로드리고를 따라가던 제이미경은 아가씨에게 시선을 주었다.
비욘느는 제이미경과 둘이서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제이미경은 다시 한 번 자작과 로드리고를 쳐다보곤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욘느를 따라갔다.
낸시도 그 모습을 보았지만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로드리고를 따라갔다.
비욘느는 비어있는 방으로 제이미경을 데리고 들어가서 말했다.
“나 말이야, 제이미경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
제이미경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떠올려 봤다.
하지만 딱히 짐작 가는 말이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이미경의 반응에도 자기 생각에 취해있는 비욘느는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었다.
“아무래도 제이미경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런데 구체적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야? 그걸 모르겠어서...”
갈수록 대화를 따라갈 수 없게 된 제이미경은 일단 손을 들어 비욘느 아가씨의 말을 막았다.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이 늙은이는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비욘느는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발을 구른다.
“아이 차암~! 바보같이 왜 그래!? 여자의 무기 말이야! 여자의 무기!!!”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대체 여자의 무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제이경은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는 듯 한 기분이었다.
“여자의 무기라니 무슨 소리십니까?!”
제이미경은 예전에 자기가 했던 말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이 어린 소녀에게 했단 말인가?
요망스런 말을 뭔가 더 지껄였던 것은 아니겠지?
이것 참...누군지 알게 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
완전히 요절을 내줘야겠어.
집사에게 한 소리 해야겠구나.
아랫것들 관리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이야.
가뜩이나 여느 레이디 같이 자라지 못하는 천방지축 아가씨 때문에 자작님의 고민이 말이 아닌데 더 삐뚤어져서야 큰일이지.
하지만 비욘느는 당황한 제이미경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제이미경은 점점 똥 씹은 표정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늙은 머리지만 그래도 며칠 전에 있었던 일까지 생각해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때의 일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말해주는데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다.
“...아가씨...여자의 무기는 좀 더 자라신 후에...지금은 그러니까...그게...”
땀을 뻘뻘 흘리는 제이미경이 불쌍하지도 않는지 비욘느는 떵떵거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란 말이야. 지금에서야 여자의 무기를 갈고 닦을 마음이 생겼는데 자꾸 이럴 거야?”
“그..그건 확실히 잘 된 일이지만 그래도...그게...”
“흥! 됐어! 그냥 세뇨르 선생한테 가르쳐달라고 그래야지. 세뇨르도 알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순간 제이미경은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누구한테 말한다고?
세뇨르~~~!
깐깐한 노인네가 삿대질을 해대며 자작님 옆에서 불을 뿜어 댈 것이 눈에 선하다.
그 옆에선 자신이 가르치는 기사들도 키득거리겠지.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
안 돼...절대로 안 돼~!
이건 할 수밖에 없다.
꼭...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는 일이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제이미경이 말했다.
“제...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야호!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자.”
“지...지금부터요?”
“응! 급하거든!”
“그..그렇군요. 하...하하하...”
“그럼 뭐부터 하면 되는 거야?”
“그..글쎄요? 웃는 연습부터 해볼까요? 허..허허..”
“응! 시범을 보여줘!”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순진무구하게 말하는 비욘느를 바라보며 제이미경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아가씨는 단순히 나를 놀리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배울 생각이 있는 걸까?
어쨌든 정말 난감하구나.
이런 생각 속에서도 제이미경은 손으로 입을 가르며 웃었다.
“호..호호호...”
그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