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5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낸시의 설명을 들은 세뇨르 선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그 시녀를 따라갈 필요는 없겠구나. 자! 가자. 나와 같이 있다가 네가 말한 소년이 용무를 마칠 때 쯤 데려다주도록 하마. 혼자서 저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세뇨르 선생은 낸시와 같이 걸었다.
노인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낸시를 배려해 주어서 그런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낸시는 세뇨르 선생과 같이 움직이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뇨르 선생이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몹시도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낸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세뇨르 선생 곁에서 숨죽이고 있자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뇨르 선생은 닫혀져 있는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금 열고는 그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서는 미묘하고도 민망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게 아닙니다. 아가씨. 웃을 때는 좀 더 상냥한 표정을 지어야지요. 그리고 웃음소리가 너무 높아요. 그렇게 높은 웃음소리는 남자에게 거부감을 주니까 주의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리도 내켜하지 않았던 제이미경은 막상 시작하고 나니 정말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의욕이 급감해 버린 비욘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이거 어렵네.”
“허허! 세상에 쉬운 일은 없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를 얻으려면 노력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 입을 가릴 때, 손은 이정도 위치가 좋습니다. 조금 더 가슴을 내밀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두어서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강조해야 합니다. 하하! 이거 정말 소싯적이 생각나는군요. 이쪽 지방에서는 레이디 바이올라 양이 최고였지요. 에메랄드빛 생기 넘치는 눈동자와 부끄러움을 머금은 뺨의 홍조하며, 그 붉고 앙증맞은 입술은 정말...크하아아~! 최고였습니다. 아마 수도 사교장에 데려다 놓아도 절대 빠지지 않는 자태였을 겁니다. 모든 기사들은 그녀를 사모했지요. 먼발치에서 그녀를 보기라도 하면 아무리 지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 댔습니다.”
“대체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금 말하는 바이올라 양이 설마 우리 할머니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
비욘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제이미경이 씽긋 웃으며 말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요.”
“뭐야? 우리 할머니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얼마나 깐깐한데. 얼굴엔 주름만 가득해서 가끔 만나게 되면 매번 여자는 어때야 한다고 잔소리만 하신단 말이야. 혹시 다른 누군가랑 착각하는 거 아니야?”
제이미경이 의연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바이올라 양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아가씨, 저도, 그리고 할머님도 젊고, 생기 넘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늙은이는 아니었죠.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도, 그리고 어린 시절도 있는 법이죠.”
“하지만 상상이 가지 않는 걸?”
비욘느가 제이미경의 이마에 자리 잡은 주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더 크시면 알게 되겠지요. 아무튼 연습을 계속 해보지요. 아가씨께선 바이올라 님의 피를 이었으니 분명 재능이 있으실 겁니다.”
“그럴까?”
“그렇고말고요.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천사처럼 귀여우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이 자세입니다. 바로 이 자세. 따라해 보세요.”
제이미경이 누가 보아도 민망한 자세를 취하며 비욘느를 재촉했다.
다른 건 그렇더라도 입을 가리며 새끼손가락에 힘을 주고 길게 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꽃다운 나이의 처녀가 그런다면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이 많은 사내가 할법한 모양새는 절대로 아니었다.
거기에 일부러 가늘게 만든 웃음소리까지 가미해 버리면 더 이상 참기 힘든 모습이 되어 버린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누군가가 등장하고 말았다.
거칠게 문을 열며 세뇨르 선생이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흠흠...도무지 더 이상은 보지 못하겠군요. 제이미경.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신 겁니까? 정말 걱정스러워서 물어 보는 건데, 혹시 요즘 정신을 차려보면 왜 이 장소에 있는지 몰라 당황하실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전 정말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 솔직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제이미경은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곁에선 세뇨르 선생의 등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욘느가 제이미경이 가르쳐 준 자세를 취하며 있지도 않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물론, 새끼손가락도 쭉 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말이지? 어때 잘 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웃어볼까? 응? 오호호호호!”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오직 비욘느의 웃음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제이미경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비욘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틀렸어? 이번엔 잘 한 것 같은데...”
“아가씨, 그만 하세요. 제발...그만...그만 하십시오...”
울상을 짓는 제이미경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비욘느가 말했다.
“왜 그래? 지금까지 잘만 가르쳐 주더니. 세뇨르 선생님 때문에? 걱정 마. 이런 건 세뇨르 선생이 매번 나한테 강조하던 건데 뭘. 그렇지? 이게 레이디다운 거니까.”
세뇨르 선생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제이미경은 비욘느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양 손을 교차해 엑스 모양을 만들었다.
“그런 건 레이디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박한 모습이라니! 노망난 늙은이의 추한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뇨르 선생의 고함에 제이미경도, 그리고 비욘느도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이미경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경박한 모습이라니요?! 게다가 노망이 났다니!!!? 그 말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소이다. 어디가 경박하단 말이요?!”
그러자 세뇨르 선생도지지 않겠다는 듯,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제이미경 앞에 양 손을 허리에 두르고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입니다! 그런 자세를 비욘느 아가씨에게 가르치다니...지금 생각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아무리 검만 휘두르는 무식한 기사라지만... 당신이 노망이 난 것이라면 조금 선처해 주겠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요.”
“뭐...뭐라고?! 지금 말 다했소?! 당신이 한 말은 비단 나만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이 자작가를 모욕한 것이요! 내가 아가씨께 가르쳐 드린 자세는 자그마치 바이올라님께서 젊으실 적에 하셨던 우아한 모습이란 말이요! 우리 기사들은 모두 그 모습에 가슴 떨리며 더욱 훈련에 열심이었단 말이오! 내 젊은 날의 로망을 짓밟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지 마시오!”
세뇨르 선생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직도 문가에 서있는 낸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꼬마야, 밖에 나가서 마부에게 의사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일러라. 제이미경이 심상치 않으니까.”
“아! 예. 지금 갈게요.”
낸시가 목발을 놀려 마부를 부르러 가려고 하자 제이미경이 소리쳤다.
“안 돼! 가지마!”
그래서 낸시는 다시 멈추어 제이미경과 세뇨르 선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이미경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갈 필요 없단다. 조금도 없어. 자! 어서 너도 문을 닫고 들어오렴. 응?”
그러면서 제이미경은 성큼성큼 걸어서 낸시 앞까지 가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 방 안에 들여놓고는 문을 닫았다.
물론,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뭐하는 거요?”
세뇨르 선생이 묻자 제이미경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노망나지 않았소.”
“정말이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게 몇 개요?”
세뇨르 선생은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보이며 물었다.
그러자 제이미경이 이를 갈며 말했다.
“세...세 개요.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그럼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요?! 노망이든 아니든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않소?!”
세뇨르 선생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제이미경을 대신하여 비욘느가 앞으로 나섰다.
“제이미경이 여자의 무기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었어. 그런데 나한테 재능이 있대!”
생글거리며 말하는 비욘느를 바라보며 제이미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쿨럭!”
“뭐...뭔 무기라고 하셨습니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세뇨르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비욘느가 검지손가락을 자기 입가에 가져다 대며 한쪽 눈을 찡긋 거렸다.
“여.자.의.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