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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26화 (126/200)

00126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이맘때, 로드리고는 자작과 지루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스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냐?

큰 기술도 배운 것이 있느냐?

스승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라.

로드리고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자작의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자작은 대륙 10강과 연을 맺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황혼의 기사는 대륙 10강이 아니다.

물론, 그들보다 강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작이 원하는 것을 알지만 그건 로드리고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정말 안타깝군. 하지만 그래도 대단하네. 자네의 말을 들어보면 잠시 사사받았을 뿐인데도 그런 경지에 들었다는 말이지 않나? 어린 나이에 그 정도면 앞날이 창창해. 자네야말로 미래의 대륙 10강이지 않겠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로드리고는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한 달간 황혼의 기사에게 검을 배우며 구르던 것을 생각하니 금세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것을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은 상상 이상이다.

어쩌면 지금 이정도만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미 이 근방에서는 최고라고 해도 반박할 수 있는 사람 따위 아무도 없다.

“그야 모르지요. 검을 수련하는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제가 어찌 미래의 대륙 10강을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로드리고는 물론 대륙 10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노력하긴 싫어서 이렇게 대꾸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듣는 자작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어린 나이에 저런 실력이라면 우쭐해질 만도 할 텐데,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구나.

이런 아이야말로 인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내가 이 아이와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이지 않겠는가?

아무리 보아도 성급한 판단과 오해가 부른 평가였다.

자작은 로드리고의 손을 잡았다.

순간 로드리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야? 이거...

나한테 관심 있어?

높은 사람 중에는 그런 취미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설마...그런 걸 기대하는 건가?

아...내가 미소년이라 이렇게 화를 부르는구나.

어떻게 보아도 미소년과는 거리가 먼 로드리고는 혼자서 착각에 빠져 얼굴을 붉혔다.

만약 자작이 정말로 그런 취미가 있었다면 로드리고보다는 에린이 위험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로드리고가 자작에게 어금니 꽉 깨물라는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엉덩이를 까서 내밀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다행히도 자작의 말이 이어졌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어떤가? 내게 딸이 하나 있으니 자네를 사위 삼고 싶은데 말이야.”

뭐...뭐라고!?

로드리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평생 꿈꿔온 일이 지금 여기서 이렇게 간단히 이루어지려 하다니...

비욘느 브라우닝이 내 아내가 된다.

하...하하...하하하...

로드리고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겨우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저는 평민과 다름없습니다. 성이 있기는 하지만 쇠퇴할 대로 쇠퇴해 버린...”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출신이 어떤지는 신경 쓰지 않겠네. 지금 같은 실력이라면 기사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보다 더 성장하게 된다면...그래서 정말 대륙 10강이라도 된다면 자네의 출신이 어떤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네. 오히려 국왕폐하조차도 자네의 눈치를 봐야 할지 모르지. 자신을 갖게.”

“그래도 에린 공자와 혼담이 오간다고 들었는데...”

“훗! 그것도 걱정할 것 없네. 에린 공자는 자네를 이기지 못했어. 이미 그 혼담은 무효화 된 것과 다름없네. 나는 자네가 뛰어난 실력을 갖게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네. 이미 마나 소드를 사용하는 실력이야! 자네 나이 때에 마나 소드를 사용한 자가 누가 있겠나? 그래도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원조가 필요하지 않겠나? 내가 그 역할을 담당해 주겠네. 자네의 후원자가 된다는 말일세. 아직 어려서 그런 것에는 밝지 못할 테니 나한테 맡겨보게. 뭐...비욘느는...그래...겉보기에는 예쁘지 않나? 응?”

“......”

그토록 바래왔던 것이지만 섣불리 그러겠노라는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왜?

손만 내밀면 바로 잡힐 것만 같은데...대체 왜?

로드리고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간절히 바래왔던 것을 실제로 손에 쥐게 된다는 사실이 겁이 났다.

그것은 정말 그렇게 값진 것일까?

내가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어야 했던 만큼...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비욘느가 과거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처럼 성장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손을 대는 순간 산산 조각나서 다시는 그 시절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순간 낸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나는 그녀의 다리를 고쳐줘야 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건 도망가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그래...나는...

로드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로드리고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자작이 그를 불렀지만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복도를 뛰다시피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는 바닥을 굴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에린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린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어디 다쳤나?”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다행이군. 너 같이 뛰어난 검사를 알게 되어 영광이야.”

에린은 맑은 눈으로 로드리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 올곧은 눈이 부담스러웠다.

“아니...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뛰어난 검사가 되지 못해요. 그냥....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저를 보지 마세요. 저는...저는 아무튼 그런 게 아니니까...”

“이봐, 로드리고! 여길 봐. 왜 눈길을 피하는 거지?”

에린은 억지로 로드리고의 뺨을 잡고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렸다.

로드리고는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단정하고 잘생긴 에린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올곧은 눈이 똑바로 자신을 응시한다.

그의 맑은 눈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드리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뛰어난 검사야. 충분히 대단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뻐기지도 않고, 대결하는 상대방도 배려해주지. 나는 너를 존경하고 있어. 물론, 너에게 심한 열등감과 질투도 느끼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그 정도는 내게도 자격이 있어.”

“저는...검술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어쩌다보니까...이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검술이 아니라...다른 거였는데...그런데...”

“아니다. 너는 검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실력을 갖출 수 없으니까. 내가 해봐서 알아.”

이 새끼는 대체 뭐야?

그러니까 아니라고 당사자인 내가 말하는데 왜 네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거야?!

가뜩이나 복잡해 죽겠는데 괜히 나타나서 지랄이야!

로드리고는 화가 났다.

정말로 검술은 아무래도 좋았다.

원한다면 검의 신전에 가서 한동안 수련하면 얼마든지 실력은 일취월장할 수 있다.

다만 미칠 듯이 힘들 뿐이다.

하지만 실력이 느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지금 일평생 바라고 바랐던 걸 내팽겨 쳐두고 도망 나왔단 말이다!

그런 시시한 걸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답답해 죽겠는데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나는...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니까...그러니까...씨발...

낸시 이 계집애는 어디 간 거야?

젠장...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좋은 기회를 전부 날려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겁난게 아니라 그냥...다 그 계집애 생각해서..그래서...

이런 로드리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가 너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너에게 져버린 나와 제이미경, 그리고 내 아버지까지 모욕하는 행위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는 좀 더 당당해야 해.”

“그러니까...아니라니까...정말...”

로드리고가 짜증스레 중얼거렸지만 에린은 도무지 떠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로드리고의 얼굴을 부여잡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게다가 뒷골이 땡기기 시작했다.

에린의 뒤편에서 다가오던 시녀 둘이 서로 입가를 가리며 ‘어머! 어머!’같은 말을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대체 뭘 상상하고 있는 거냐?!

그런 거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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