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브라우닝 자작은 아쉬움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가 느끼기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잘못되었기에 저 소년은 도망치듯 나가버렸을까?
내가 너무 앞서나갔을지도 모르겠군.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이런 이야기는 좀처럼 이해하기도 어렵고 거북했을 테지.
어린애에게 결혼 이야기까지 꺼내고...내가 성급했어.
부끄러워 도망가도 탓할 수 없지.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혼자서 자책하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렸는데 뜻밖의 사람이었다.
“이거...크레이머 남작이 아닌가? 아까는 좋은 대결을 보여주었네. 훌륭한 마나소드였지.”
자작은 잠시 동안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언제 그랬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남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군요. 그보다 잠시 시간이 되십니까?”
자작은 딱히 바쁜 일은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이미 끝난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남작에게 잡혀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연히 그의 대답은 거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미안하군. 오늘은 좀 바빠서...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가 직접 사람을 보내겠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남작도 그 의미를 이해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자존심을 세우러 온 것이 아니다.
가문이 걸려있다.
여기서 제대로 결착을 짓지 못하면 앞으로의 상황은 뻔하다.
“잠시면 됩니다.”
남작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작은 거절로 일관할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 잠시도 안될 만큼 급한 일이 있다네. 이거 다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고집을 부려서야 되겠나? 내 여유가 생기면 사람을 보낼 테니 이만 가보게.”
“자작님!”
남작은 눈에 힘을 주고 자작을 노려보았다.
순간 자작은 조금 겁이 났다.
세력 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지만 지금 당장 남작과 붙어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으로 검술을 익히기는 했지만 남작과 같은 경지는 요원했다.
물론, 그런 남작도 오늘 어린애에게 져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자작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임에는 틀림없었다.
곁에 제이미경이 있었다면 고집대로 밀고 나갔겠지만 지금은 혼자다.
극한까지 궁지에 몰린 쥐는 결국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조금은 도망갈 틈을 남겨줘야 한다.
“흠흠! 그럼 내 특별히 시간을 좀 내겠네. 자네와 나 사이에 매정하게만 굴 수도 없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남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만 조금도 감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권하지 않았음에도 남작은 자작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제 아들놈과 자작님 영애와의 혼담은 아직 유효한 것입니까?”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그 말이다.
자작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답답한 사람아! 그 이야기는 이미 약조를 하지 않았나?”
원래 사람은 다 자기가 듣고 싶은대로 듣지 않던가?
거절의 의미가 짙게 담겨있음에도 남작은 전혀 다른 말을 지껄여댔다.
“후우...감사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었군요. 조금 전 무례했던 점에 대해선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남작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거듭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지만 자작은 얼른 남작의 행동을 막으며 말했다.
자작이 느끼기에는 남작도 충분히 의미를 알았을 터인데도 이렇게 모르는 척 하며 넘어가려는 저의가 못내 괘씸했다.
자연히 목소리도 날이 서고 만다.
“오해가 아니네.”
“예?”
남작은 못 알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재차 물었다.
“오해가 아니라고 그랬네. 애초에 혼담에 대해서 뭐라고 그랬었나? 오늘 대결에서 에린 공자가 이겨야 성립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남작은 몇 차례나 입술을 깨물며 씩씩대더니 말했다.
“하지만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자작님도 분명히 우리의 연합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셔서 저와 의기투합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맞네. 나도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지. 하지만 자네도 보지 않았나? 아니, 검까지 겨뤄봤으니 오히려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런 말을 내게 하고 있는 건가? 대륙 10강이네. 내가 자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대륙 10강과 연을 만드는 것 보다 더 이득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나? 만약 그렇다면 나를 설득해 보게.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으면 다시 상기시켜 주게나.”
남작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시골 남작가 하나가 일인군단이라 불리는 대륙 10강에 비길 수 있을까?
하지만 가문을 살리려는 간절한 마음은 그의 입을 억지로 열어 주었다.
“그 소년의 스승이 대륙 10강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하하! 근래 들어 가장 어이없는 농담이로군. 그럼 묻겠네. 대륙 10강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런 소년을 키워낼 수 있단 말인가? 내게 답을 줘보게.”
“자작님...제발...”
남작은 결국 인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가문이 망한다.
자작은 남작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보게, 나를 매정하게 만들지 말게. 나는 자네를 꽤 좋아해.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네. 그렇지만 가문을 이끄는 건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돼.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만 물러가게. 혼담은 더 이상 없네. 그리고 나 말고도 얼마든지 자네를 도와줄 수 있는 영주들이 있을 걸세. 내가 자네의 마지막 보루는 아니야. 그렇게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표정은 그만 두게나.”
“전...자작님을 믿었습니다.”
“하하...자네,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낮추지 말게. 지금 일어나서 이 방을 나서면 아직은 자네의 자존심도, 그리고 명예도 지킬 수 있네. 그러나 이대로 계속 고집을 부리면 나는 사람을 부를 수밖에 없겠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자네에게 그런 치욕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네. 자! 내가 항상 존경해 마지않는 그 당당함을 다시 보이게. 응?”
남작은 더 이상 자작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서 어떠한 간청도 소용없다.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예의를 지켜서 자네를 대했네. 그런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섭섭하군.”
“자작님과 저는 예의라는 단어를 다르게 배운 것 같군요.”
“그런 것 같군. 우리 집에 세뇨르라는 선생이 있으니 원한다면 잠시 예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아니요. 이젠 저도 자작님이 말씀하시는 예의가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선 배울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제가 앞으로 자작님을 대할 때는 자작님이 오늘 가르쳐주신 예의로 대할 거라는 걸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이는 앞으로도 매우 좋겠군. 그렇지 않나?”
“그럴 겁니다.”
“잘 가게. 그동안 내 집에서 지내며 불편한 일은 없었기를 비네. 그리고 언제든 떠나도 좋지만 굳이 나를 보고 갈 필요는 없네. 바쁜 와중에 자네에게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일정이 많이 늦어져서 말이야.”
남작의 차가운 시선으로 자작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자작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남작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말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에 자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남작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자작은 허공중에 쓸쓸히 남아있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무엇을 배웠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남작은 막상 응접을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막대한 빚을 갚을 길은 없다.
어디 가서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에린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수 없다.
몰락해 버린 영지도 없는 가문의 이름만 남을 뿐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자작에 대한 분노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렇게 태도를 바꿔버리다니...
귀족의 명예도 모르는 족속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에린을 찾자.
기사들도 불러 모으고.
더 이상 이곳에는 있고 싶지 않구나.
이전엔 몰랐던 악취가 곳곳에서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대체 그 소년은 뭐란 말인가?
어디서 튀어나와 그런 실력을 보인단 말인가?
대륙 10강...
정말 그들 중 하나가 그 소년의 스승일까?
그 소년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모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