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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28화 (128/200)

00128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이거 놔요!”

로드리고는 에린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막 곁을 지나가던 시녀들이 놀란 표정으로 둘을 곁눈질 했다.

하지만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돈다.

그것이 더욱 열 받는다.

젠장!

“이상하게 오해받았잖아요!”

로드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에린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뭘 오해 받았다는 거지?”

차마 이러쿵저러쿵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엔 로드리고도 얼굴이 화끈거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됐어요.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하면 내가 도와주지. 마침 지금은 한가하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계속 같이 붙어있으면 좀 그렇다니까...”

“내 실력 때문인가? 나는 자네와 어울릴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그 점은 나도 자각하고 있어.”

금세 시무룩하게 변한 에린을 무시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뭔가 크게 나쁜 일을 저지른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실력은 상관없어요. 그보다 저기...저 같은 것과 어울리는 것은 별로 좋지 않으니까...그게 저는 제대로 된 귀족도 아니고...이제는 성만 남았을 뿐이라...”

결국 로드리고는 네가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고 말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에린과 계속 같이 다니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귀족 놈 가슴에 대못 박아 놓고는 밤길이 무서워 질 것 같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에린은 숨은 뜻은 아무래도 좋았던 것일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이미 로드리고는 실력으로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앞으로 누군가 신분으로 너를 핍박하고 모욕주려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린은 손을 내밀었다.

로드리고는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마주잡아 주었다.

악수 정도야 못해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 자식은 처음부터 악수할 생각은 없었던 것일까?

손을 잡고는 그대로 나란히 걷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까지 걸려 있다.

이 새끼...이거 진짜로 의심스러운데...

콧노래는 왜 부르는 거야?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었어. 매일 같이 검술 훈련만 하다보니까 그럴 겨를이 없었지. 주변에서 같이 검을 익히는 기사들도 나와는 신분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깍듯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우정은 피어날 수 없었지.”

분위기상 차마 이 손 놓으라고 말하지 못하고 로드리고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계속해서 에린을 따라갔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항상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이런 이야기를 했다간 아버지에게 단단히 혼이 났을 테니 항상 마음속에만 간직했지만...그래도 소망을 버렸던 적은 없었어.”

“그...그렇군요. 언젠가 좋은 친구가 생기시면 좋겠습니다.”

로드리고는 적당히 맞춰주며 따라 걸었다.

하지만 에린이 걸음을 멈추고 로드리고를 활활 타오르는 열망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뭐야...이 새끼...아무래도 내 몸을 요구하면 죽방 날린다.

아무리 귀족이어도 죽방 날린다.

무조건 죽방 날린다.

로드리고는 자기가 현 체제의 권력 앞에 쫄아서 아무 것도 못할까봐 스스로에게 열심히 주문을 걸었다.

잡아먹을 것 같은 눈초리의 에린은 확실히 위험해 보였다.

마침내 에린이 쥐고 있는 손을 다른 손까지 더하여 포개 잡으며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리고 드디어 그 친구를 발견한 것 같아.”

그 친구라는 건 어떻게 보아도 로드리고 자신이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여기서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여 주기 싫었다.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자.

“저도 기쁘네요. 그분과 친구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바빠서...이쯤에서 그만 볼일을 보러 갔으면 좋겠습니다만...”

“하아!”

에린은 과연 로드리고의 말을 듣기는 한 걸까?

갑자기 활짝 웃는 얼굴로 로드리고의 손을 자기 뺨에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닌가?

이 미친 새끼!

뭐냐?!

씨발...누구 없지?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며 로드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가보겠다니까 뭔 지랄이야?

이 새끼 존나 이상해.

정말 제대로 된 건 얼굴 하나밖에 없는 새끼라니까.

내가 아직도 죽방 날리지 않고 있는 건 이 새끼 권력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새끼가 가진 유일한 장점을 이 손으로 산산조각 내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래...인생이 불쌍하니까...

“기도는 필요하지 않아. 그 친구는 바로 너야! 내가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건 바로 너라고!”

반짝이는 눈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보는 에린.

그리고 썩은 눈동자와 반쯤 열린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에린을 바라보는 로드리고.

조금도 닮지 않았고, 조금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 사이가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어차피 조금 있으면 헤어져서 다시는 볼 일도 없을 텐데 아무려면 어떨까?

죽은 놈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아직 새파란 이런 놈 소원 하나쯤...

어쩌면 진짜로 죽게 되었을 때, 좋은 곳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해봤자 며칠이다.

며칠만 친구인 척 해주면 되는 거야.

그럼 귀족 놈에게 원한 살 일도 없고, 어쩌다 곤란하게 되면 찾아가서 비빌 언덕도 생기는 셈이지.

물론, 아주 위급할 때가 아닌 이상 찾아가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놈은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면 위험하니까.

“와...아...아아아! 저..저도 기쁘네요. 하...하...하하..하....”

억지로 지어진 미소로 로드리고는 환호성을 흉내내보았지만 제대로 되질 않는다.

그래도 에린은 그걸 느끼지 못했는지 와락 로드리고를 껴안아 버렸다.

잠깐!

이..이건 아닌데...

나는 이런 것 까지 용납한 적은 없는데...

그..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이 자식...왠지 좋은 냄새도 나고...

킁킁...킁킁...

로드리고는 자기보다 큰 에린의 품에서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귓가에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어. 고마워...정말 고마워...”

긴장되어 뻣뻣하게 굳어있던 근육이 노곤 노곤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뭐..저도 공자님이 좋아하시니까 좋네요. 헤헤헤...”

그러나 그 말과 동시에 에린은 로드리고를 품에서 떼어내더니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자님이 아니라 에린.”

“예?”

“에린이라고 불러. 나도 로드리고라고 부를 테니까. 친구는 그런 거잖아?”

이거 새끼가 꽤 진지하게 하려고 하네.

해달라는 대로 해주지 뭐.

“그럴게. 에린. 이렇게 말입니까?”

“존댓말도 쓰지 말고.”

“그래도 누군가 보면...그게...제 입장이...아무래도...”

“내가 허락한 일이야. 누구도 토를 달수는 없어.”

“그럼 뭐...적당히...에린...알았어.”

에린은 다시 한 번 로드리고를 꼭 껴안았다.

로드리고는 그 품에 안겨서 어딘지 중독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새끼, 장점은 얼굴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안기니까 의외로 품이 포근하네.

아주 나중에 여자들이 껌뻑 죽겠네.

젠장...부럽다...

한참만에야 에린은 로드리고를 놓아주었다.

물론, 그 한참이란 시간동안 자작가의 고용인들이 둘의 모습을 쳐다보고는 수근 거렸지만 이제는 로드리고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로드리고, 그보다 볼 일이라는 게 뭐지?”

“아! 그거...”

젠장...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네놈이 부담스러우니까 적당히 핑계 댔던 것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머리를 굴리다보니 낸시가 떠올랐다.

맞아! 그 계집애 찾아야지.

“나랑 같이 다니던 절름발이 계집애 기억하지? 걔가 어디 갔는지 안보여서. 걔가 내가 없으면 안 되거든.”

“아! 그렇군. 그 아이는 어떻게 만난 거지?”

“그게...그냥 우리 집 하녀야.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다리를 다쳐서 고쳐주려고 여행 중이지.”

“너한테 소중한가 보군.”

소중?

그...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계집애가...그럴 리가...없지...암...없지...없고 말고....그럼...그럼...없지.

“내가 괜한 것을 물어봤군. 당연히 소중하니까 고된 여행도 하는 것이고, 잠시 눈에 보이지 않는데 걱정되어 찾는 것일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그녀를 소중히 대해주겠어. 그것이 너에 대한 나의 우정의 표시다.”

잠깐!

뭘 소중히 대해줘!

씨발! 너 같이 생긴 새끼가 낸시한테 잘 대해주면....젠장...

당연히 안 돼지!!!!!

“아..그..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아. 친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히 존중받을 필요가 있지. 나도 이 나이까지 검만 휘두른 것은 아니야. 우리 집에도 예의를 가르치는 분이 계시지. 항상 그 분에게 들었어.”

“진짜...그러지 말라니까...”

울상을 지으며 로드리고가 말했지만 단호한 에린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항상 느끼지만 이 새끼 진짜 성가시다.

누가 말하면 좀 들으란 말이야!!!

그렇게 둘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크레이머 남작.

그는 입가에 묘하고 뒤틀린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이용해 먹을 수 있겠군. 자작...모든 것이 당신 생각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궁지에 몰리면 별 볼일 없는 미물도 천적에게 달려드는데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오. 저 소년을 당신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 역시 당신이란 패를 버리고 대륙 10강을 얻지 말라는 법은 없지. 이건 전부 당신이 자초한 것이오. 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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