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비욘느는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말했다.
“봤지? 너도 분명히 봤지? 에린 공자의 무례한 행동을 말이야! 잘못했으면 저런 남자랑 한평생을 살 뻔 했다니까. 여자로 태어난 건 정말 불행해. 마음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도 할 수 없는걸.”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낸시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자기 생각에 빠져 버린 비욘느는 그런 자잘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비욘느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에린 공자는 자기가 잘난 줄 안단 말이야. 하지만 오늘도 로드리고에게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졌잖아? 형편없는 실력인데도 그 콧대는 전혀 꺾이지 않아. 그저 상대가 로드리고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로드리고만 아니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오만함이 또 어디 있겠어?”
“하지만 그렇게 오만해 보이지는 않던걸요? 굳이 말하자면...꽤 예의바른 분이신 것 같아요.”
“뭐?! 아니야! 그게 아니란 말이야! 너는 속고 있어! 나도 처음에는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뭐, 이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알면 알수록 정말 별로였다니까. 어딘지 음침한 구석도 있고,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은 또 얼마나 심한지... 전에는 검을 한 번 빌려서 휘둘러 봤는데 안절부절 못하더니 금방 내게서 다시 빼앗는 거야. 그리고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내게 화를 내곤 가버렸다니까. 글쎄 나는 검을 휘두를 자격이 없다나? 그냥 자수나 하라는 거지 뭐. 자기가 뭐라고 내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건 운이 좋아서 좀 더 일찍 태어난 것뿐이야. 게다가 10년만 지나면 더 이상 장점도 아니게 될 걸? 이제 알겠어? 너는 그를 오해하고 있는 거야.”
비욘느의 열변도 그다지 낸시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아니에요. 아가씨야말로 에린 공자님을 오해하고 있을지 모르죠. 저에게 항상 예의를 갖춰서 대해주시는 걸요? 그리고 여자가 자수를 하는 게 어때서요? 한땀 한땀 바늘이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예쁜 그림이 그려지는 걸요. 나중에 그걸 쓰게 되는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껏 바느질 하는 건 참 기분이 좋아요. 아마 에린 공자님이 빌려주었던 검을 빼앗은 건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아무래도 검은 위험한 물건이니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예?”
비욘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낸시의 말을 듣고 있다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아! 몰라! 아무튼 다 끝난 이야기야. 그와의 혼담은 이제 물 건너갔으니까. 그런데 뭐야? 혹시 에린 공자한테 반했어? 그를 편들어 주는 것이 보통이 아닌 걸?”
비욘느는 낸시의 가슴을 은근슬쩍 팔꿈치로 툭 치며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낸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팔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요! 그...그럴 리 없잖아요. 저 같은 게...어떻게...좋아하지 않아요. 절대로...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에린 공자님은 좋은 분이신데 아가씨께서 오해하시는 게 안타까우니까...그래서...”
“흐음...뭐, 알겠어.”
“후유...”
그러나 가슴을 쓸어내리는 낸시에게 비욘느는 다시 한 번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럼 로드리고를 좋아하는 거야?”
어느 정도 긴장이 풀어진 낸시는 어이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 설마요. 도련님은 그냥 어린애에요. 매일 일은 안하고 놀러만 다니는 걸요. 장난이나 치는 코흘리개를 좋아 할리 없잖아요. 도련님은 그냥 철없는 동생 같달까? 뭐 그렇죠.”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로드리고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오호라! 그래? 낸시 네가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야 알겠네. 어린애? 철없는 남동생? 하이고!”
낸시가 슬쩍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과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때를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비욘느는 로드리고 곁으로 다가가더니 말했다.
“로드리고! 잘 왔어! 안 그래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오늘 정말 대단했어. 크레이머 남작님까지 이기다니.”
하지만 로드리고는 기분이 상했는지 비욘느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딴전을 피우고 있는 낸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봤자 어린애일 뿐이죠. 철도 없고요.”
낸시는 괜히 멀쩡한 목발을 두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 모습이 로드리고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했다.
저 계집애...이번 일을 그냥 넘기려 하는 구나.
나는 지금까지 지가 걱정 되서 계속 찾으러 다녔는데 여기서 내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니...
기르던 개한테 물린 기분이 이러할까?
그래. 내가 요 며칠간 조금 어리광을 부린 것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손가락이 아팠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리고 내 손가락을 그렇게 만든 것도 결국은 낸시 너였잖아?!
일일이 따져보면 할 말은 무진장 많지만 여기는 안타깝게 비욘느도 있고...젠장...
한창 씩씩 거리며 분을 참고 있는 로드리고에게 비욘느가 한껏 귀여운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저기 나는 말이야 로드리고가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아! 검술이 그렇게 강한걸. 그러니까...저기...”
몸을 비비 꼬는 비욘느를 바라보며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얘는 또 왜이래?
똥마렵나?
그럼 얼른 가서 일을 볼 것이지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러다 가스가 새면 자기 방귀는 꽃향기니 뭐니 하면서 무마하려하면 조금 열 받을 것 같은데...
나는 뭐라 해도 비욘느에 대한 환상이 있는데 이 꼬마가 그런 걸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무튼 여기선 낸시 계집애를 데리고 자리를 뜨는 편이 좋겠어.
“비욘느 아가씨,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도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일을 보세요. 야! 낸시! 목발 이상 없으니까 그만 살피고 따라와!!!”
두 여자아이에게 극과 극의 어투로 이야기하며 로드리고를 앞장서 걸었다.
낸시는 비욘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목발을 짚고 서둘러 로드리고를 따라갔다.
그런 둘을 바라보면서 비욘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을 보라니...? 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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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는 평소 사용하던 침실로 들어섰다.
처음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만 낸시 계집애가 개처럼 헥헥 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조금 찜찜해서 결국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건 이거고, 아까 있었던 일은 별개다.
나는 아무튼 어른이니까 이런 걸 전부 구별하고 있는 거야.
딱히 일일이 모든 일에 기분과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고!
알고 있냐?! 계집애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퍼져 나오는 고함소리를 꾹꾹 삼켜가며 로드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게다가 먼저 입구에 도착한 로드리고가 침실 문을 연채로 서서 낸시가 방으로 들어 설 때까지 문을 잡고 서 있었다.
그럼에도 낸시는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스쳐가는 사이 들린 소리라고는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얼핏 보였다.
그걸 보자 로드리고는 조금만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예 혼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엔 너무 억울했다.
“너 말이야. 조금 전에...”
로드리고가 막 말을 꺼내려하자 낸시가 손을 들고는 그의 말을 막았다.
“자...잠깐만요. 도련님...하악...하악...조금만 쉬고요.”
아닌게 아니라 로드리고가 나름 배려해 줬다고 생각했는데도 낸시한테는 버겨운 속도였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로드리고는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멍청한 계집애야! 힘들면 조그만 천천히 가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 아니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바보야?! 응?! 입이 없어? 벙어리니?”
답답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낸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그러고 보니 이 계집애, 아까 방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녀가 뭐라 시부렁거렸는데 당최 제대로 알 수가 있어야지.
결국 로드리고는 애초에 조금 갈구겠다는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아까 자작님이 나가 있으라고 했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그치듯 묻는 로드리고의 물음에 낸시는 침대까지 절뚝이며 움직인 후에 가장자리에 앉아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기가 늦은 것이 잘못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로드리고는 머리가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까 그 시녀를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볼기짝을 몇 대 정도 때렸어야 했다고 로드리고는 자책했다.
그보다 이 계집애는 당최 무슨 생각이야?
그게 왜 지 잘못인데?!
“야! 그만! 그만해!!! 한번만 더 네 잘못이라고 말하면 나한테 맞을 줄 알아!? 알았어?! 그보다 그 시녀년 어딨어?! 아직 떠난 건 아니겠지? 내가 그대로 보내나 봐라!”
로드리고가 막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서려고 할 때, 낸시는 그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지 말아요!”
“왜?!”
로드리고가 고함을 질렀다.
“아무튼 저 때문에 일을 잃었잖아요. 저도...그 언니가 잘한 것만은 아니란 걸 알아요. 하지만...일을 잃는 것은...더 이상 여기서 필요 없다는 의미니까...그러니까...불쌍해요...”
순간 로드리고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우리 아버지가 말한 셈이지.
낸시 너는 더 이상 우리 집에 필요 없다고 말이야.
젠장...
결국 로드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