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에린은 크레이머 남작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로드리고에게 그의 스승에 대해서 묻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크레이머 남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와 그는 친구입니다. 만약 제가 그 스승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말해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스승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말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게 친구인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한 말을 믿지 못한다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닐 테니까요.”
에린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크레이머 남작은 답답한 표정이었다.
눈썹은 역팔자를 그리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힌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냐?”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결론에 도달했구요.”
“거지가 될 생각이냐?! 빈털터리 귀족으로 조롱을 받을 생각인 게냐?!”
“그래야 한다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귀족은 귀족다워야 합니다. 아버지, 저를 위해서 불명예를 감수하지 마십시오. 비록 지금은 이렇게 몇 걸음 물러나야 하지만 제가 열심히 해서 다시 가문의 이름을 높이는 날이 오도록 하겠습니다. 영지를 몰수당하더라도 귀족의 자부심만은 지키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쌓아 오신 드높은 명예를 제 앞날 때문에 더럽히신다니요? 그런 일을 제가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이미 가난한 생활을 할 각오가 섰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지만 크레이머 남작은 표정은 갈수록 험악하게 바뀌어 갈 뿐이었다.
그는 거칠게 손을 들어 올려 에린의 말을 막았다.
“가난한 생활을 할 각오가 섰다고?”
어딘지 음울하고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예. 그러니까...”
“크하하하! 하하하하! 내 명예를 위해서? 지금 네가 내 명예를 운운한단 말이냐?!”
“아버지 저는...”
“닥쳐라!!! 네놈이 감히 내 말에 토를 달고 그 간단한 일도 하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니! 네놈이 지금껏 한 것이 뭐가 있다는 말이냐? 기껏해야 검술이나 익히면서 ‘힘들어’라는 말만 속으로 주구장창 늘어놓았겠지. 네놈이 끊임없이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어영부영하는 걸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냐?! 가문의 이름을 드높여?! 형편없는 네놈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걸 할 수 있다고?!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말이냐?! 명예? 하하...하하하! 명예 좋지. 그래. 나는 명예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명예가 내 가문을 송두리째 산산조각 낸다면 나는 그런 명예 따위 전부 내던져 버리겠다. 이제는 어린 아이의 꿈에서 깨어 나거라! 언제까지 동화 속에서 살아도 좋은 것은 아니니까! 잘난 척하는 귀족으로서의 설교도 집어 치워! 아무것도 감당할 것이 없는 네놈이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내가 허락지 않겠다! 네놈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단 말이다! 네놈은 내가 우스워 보이겠지. 그 어린놈에게 져버린 내 실력이 하찮아 보이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아버지께서 하시려는 일은 올바르지 않으니까...”
“그런 소리는 됐다. 네놈이 나를 아직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당장 가서 그 건방진 놈을 누가 가르쳤는지 알아오란 말이다! 그게 내가 네놈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10년도 넘는 시간동안 네놈을 먹여주고, 검술도 가르쳐 주었다. 그 은혜를 갚으란 말이다! 내가 오늘까지 네놈에게 뭔가 요구한 것이 있더냐?! 나는 지금껏 단 하나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아주 하찮은 것이지! 네놈이 친구라고 떠드는 그 천한 개새끼의 자그마한 비밀을 알아오라는 것뿐이야. 그것이 힘들면 놈에게 내가 네놈에게 쥐어준 것을 먹이거나! 알겠느냐?!”
“저는...”
짜악!
기어코 크레이머 남작은 에린의 뺨을 때렸다.
에린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그의 머리를 크레이머 남작이 발로 밟았다.
“헛소리는 집어 치워라. 언젠가는 네놈도 내 말을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닌 것 같구나.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 나도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어린 아이의 투정을 더 이상 들어 줄 수는 없다. 가서 놈에게 묻고 그것을 알려 주지 않으면 놈을 기절시켜서 이리로 데려 오거라. 그럼 우리는 그놈을 데리고 우리 영지로 돌아가면 되니까.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너는 항상 나를 실망시키는 부끄러운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아주 작은 일을 함으로써 내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다. 알겠느냐? 너의 가치를 증명해라. 어서!”
크레이머 남작은 발에 힘을 주어 에린의 머리를 한차례 바닥에 더욱 밀착 시키고는 발을 치워주었다.
에린은 아버지의 발이 머리에서 치워졌음에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인 채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다.
내가 존경하던 아버지는 엄격하지만 무척이나 명예롭던 분이셨어.
이런 비열한 일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서 계셨다.
평소에는 넓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등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좁아 보였다.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해 지는 것만 같았다.
그건 슬프고, 또 가혹한 일이었다.
그가 오늘날까지 선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위대한 우상이 조용히 기울어 간다.
이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니면 가혹한 상황이 아버지를 변하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던 간에 슬픈 일이다.
에린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의 아버지는 존경할 수 없다.
로드리고에게 검술로 진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놀라운 결과이긴 했지만 그런 것이 내 안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
다만 위기를 이렇게밖에 대처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결정은 내 안에 아버지의 존재를 흔들어 놓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다시 정리했다.
“아버지...”
그의 부름을 듣고 크레이머 남작이 소리쳤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네놈이 나를 다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네놈이 내 지시를 완수한 이후가 될 거야!”
에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더 이상 저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겠군요. 아마도 영원히..크레이머 남작님.”
계속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작은 그제야 다시 에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뭐라고?!”
그의 고함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들으며 에린은 생각했다.
그토록 무섭게만 들리던 아버지의 고함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의 뜻에 동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네놈은 더 이상 크레이머가 아니다! 그래도 좋단 말이냐?!”
처연한 표정으로 에린이 말했다.
“그럼 저는 이제 그냥 에린이군요.”
“네놈이...네놈이!!!!”
“전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검술 실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강하고 제가 가야 할 길을 항상 보여줬으니까요. 지금이라도 당신이 다른 결정을 내린다면 저는 여전히 당신을 존경하며 그 길을 기쁜 마음으로 따라 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대로는 전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명예가 없습니다.”
크레이머 남작은 한손을 들어 자기 눈을 가리며 말했다.
“크...크크큭...하하하! 아직도 어린 아이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군. 지금 네놈이 저지르는 짓이 무슨 짓인지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어. 잘 들어라. 멍청한 녀석아! 누구든 언젠가는 달콤하고 정의로운 꿈에서 깨어날 날이 오지.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다 꿈을 깨어나는 날이 너무 늦게 되면 말이야, 모든 것들은 산산조각 나고 말지. 비참한 과거를 후회하며 눈물을 삼켜야만 해. 지금 네놈이 멋대로 크레이머란 성을 버리고, 내 아들임을 포기하면 나중에는 돌아오려 해도 돌아올 곳이 없게 될 거다. 모두 빚쟁이들이 가져가고 없을 테니까. 과거 너의 땅이었던 곳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거다. 네 손에 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은 빠져나가고 말아.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냐?”
“아니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명예입니다.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를 원할 뿐입니다. 그리고...당신의 아들임을 부인한 것도, 그리고 크레이머란 성을 빼앗은 것도 모두 당신입니다. 그건 제가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한 녀석. 가거라. 내 눈 앞에서 사라져!!!”
“......”
에린은 남작을 향해 허리를 한차례 굽혀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하지?
크레이머 남작의 생각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것 이외에는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구나.
아버지, 당신은 저에게 처음으로 한 가지 일을 요구했다고 하시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무언으로 꽤 많은 것들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그 부분에서 당신을 만족시켜 드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제 모든 것을 기울여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옳지 않은 일에는 작은 노력조차도 기울 일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당신이 저에게 가르쳐준 것이고 제가 배워온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제가 살아온 삶들을 부정하고 전혀 다른 길을 가라면 그건 지금까지 알던 당신을 잊으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에린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로드리고의 방문 앞에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