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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34화 (134/200)

00134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야! 그런데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이것저것 따져보면 내가 오빠고 네가 여동생이라고 해야지. 그것도 철없는 여동생 말이야. 그렇지 않냐? 너 아까도 결국 그 시녀한테 얻어맞고 들어온 거고 내가 혼내주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응? 잘 생각해 봐. 그렇지?”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를 도와준 건 세뇨르 선생님인데요?”

“......”

순간 로드리고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이 계집애...왜 그런데서만 똑소리 나는 거냐?

그냥 그렇다고 해주면 안 되냐?

이런 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낸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냥 그렇다고 해둘게요.”

하지만 그녀의 그 말은 로드리고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뭔가 더욱 비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로드리고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요즘 좀 건방져 졌어. 알고 있어? 저번에 손가락도 그렇고...”

“손가락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저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까.”

쌓인 것이 있는지 낸시가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리고도 조금 찔리는 것이 있는지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내가 뭐라고 했나?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근데 우리 이제 마을로 돌아가는 건가요?”

“어?! 마...마을? 아....갈 거야. 당연히 가야지.”

“그럼 내일?”

낸시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뭐...여기 편하니까 조금 더 머물러도 좋지 않을까나?”

“그럼 모래요?”

이 계집애는 ‘좀 더’가 너한테는 하루냐?!

팍팍 좀 쓸 것이지 좀스럽게시리...

“그게 모래는 안 될 것 같아.”

“왜요?”

“너는 말해도 몰라. 내가 아까 자작님하고 중요한 이야기 한 거 몰라? 그때 남자들만 사용하는 전문용어 엄청 사용해서 말해가지고 너한테 설명하려는 날 샌다니까.”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요, 뭘. 말해 보세요.”

이 계집애 오늘은 날을 잡았나?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야! 그러고 보니까 비욘느 아가씨는 아주 예쁘더라. 그렇지 않냐? 누구랑은 다르게 촌스럽지도 않고 보고 있으면 주변 배경이 반짝이는 것만 같아.”

낸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예. 예쁘시죠. 저 같은 거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우세요.”

“야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냐? 그냥 비욘느 아가씨 예쁘다는 거지. 왜 그렇게 비관적이게 말하는 거야?”

“그냥 그렇다고요. 어차피 너 못생겼으니까.”

“이야~! 이거 완전히 패배감 쩌네?! 야! 너도 귀여워. 아주 예쁜 건 아지만 그게...그냥 귀여운 편이니까 그렇게 비관할 필요 없어! 물론 촌티 좀 나지. 그런데 어떻게 하냐? 너 촌년이잖아?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거지. 그래도 앞으로 크면 가슴도 커지고, 얼굴도 좀 더 귀여워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그냥 아가씨가 귀엽다는 거지, 너 못생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알겠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그런 건 됐으니까 말 돌리지 말고, 전문용어 많이 쓰셔서 설명해 보세요. 조만간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요.”

“어?! 아! 맞다. 맞아! 우리 그 이야기 하고 있었지? 하하하! 아하하!”

젠장...

로드리고가 화내고 무마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로드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문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아..하하하...누가 왔네? 너는 다리도 아프니까 그냥 앉아 있어. 하하..하하하..”

“아휴...정말...”

낸시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지만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문을 두드린 것은 에린이었다.

평소라면 왜 왔냐고 말하면서 빨리 용건만 듣고 보내버렸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로드리고는 밝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에린 아니야?! 어서 들어와! 무슨 일이야? 응? 아! 일단 좀 앉아.”

마치 평생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환대한다.

에린은 로드리고의 친근한 태도와 환대에 우울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게...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 앞이라서...그래서 얼떨결에...”

그 말에 로드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 네가 뭐 몽유병 환자냐?!

정신 차리면 번뜩 아무 장소에나 가있게?!

이 새끼...좀 위험한 새끼 아니야?

그래도 당장은 내 핑계거리가 되어 주니까 좀 더 여기 붙잡아 두자.

뭔가 위험한 행동 보이면 파박 해서 기절시키거나 하면 될 테니까.

나는 엄청 쎄다고!

“하하! 그거 잘 됐네. 아무 때나 찾아오면 어때? 어차피 진짜 내방도 아니고...그런데...이런 일 자주 있어?”

그래도 조금 찜찜한 기분에 몽유병이 있는지 돌려서 물어본다.

“아! 아니...나는 친구가 네가 처음이니까...그러니까 흔한 일은 아니야.”

에린은 조금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애초에 로드리고가 물어봤던 질문과는 조금 대답의 핀트가 맞질 않는다.

“이...이야야아아~! 하..하하...하하하...그것 참 좋네...네 첫 친구니까...하..하하..하하하..”

딱 봐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표정과 어투였지만 다행히 에린은 그다지 눈치 있는 편이 아니라 깨닫지 못했다.

그때, 침대에서 목발을 짚고 몸을 일으킨 낸시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에린 공자님.”

“아! 레이디 낸시.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건넸어야 했는데...”

“아니요...저는 레이디도 아니고...그런 말씀은 됐어요.”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드리고의 표정이 미묘하게 떨렸다.

저...저게 뭐야?!

낸시의 얼굴이 조금 붉다.

눈은 반짝이고, 입가에는 흔치않은 미소까지 걸려있다.

저 계집애...좋아 하는 거냐?!

꼴에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

어디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지랄이야?!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여기서 지켜보고 있는데!

“야! 너 가서 뭐 마실 것 좀 얻어 와라.”

로드리고가 빨리 낸시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하지만 에린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딱이 뭔가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너를 만나러 왔을 뿐이니까. 게다가 레이디 낸시는 다리도 불편하니 그런 수고를 시키면 내 마음이 불편할 거야.”

그러냐?!

네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된다고?!

그럼 내 마음은?!

응?! 내 마음은 엄청 불편해도 상관없는 거냐?!

이 새끼 완전 이기적인 새끼 아니야?!

“아니야. 낸시는 목발 짚고 걸어 다니는 거 연습도 해야 하고. 익숙해지려면 많이 걸어 다니는 수밖에 없지. 그렇지, 낸시? 응?”

“......”

저 계집애가 대답 안하냐?!

확 그냥!

“낸시?!”

다시 언성을 조금 높이자 낸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휴...다녀올게요. 에린 공자님, 천천히 다녀오면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도련님 말씀대로 익숙해지는 편이 저한테도 좋으니까.”

“그래도...”

“아! 정말! 쟤도 괜찮다고 말하잖아? 에린 일단 여기로 앉아. 응? 그런 사소한 거 신경 쓰지 말고. 낸시 너는 빨리 서두르고!”

“방금은 천천히 다녀오라면서요?”

“그러니까 방에서는 빨리 나가고 밖에서는 천천히 다녀오라는 거지. 아주~천천히. 내 말 알았지? 무리하지 말고. 그러니까 우리는 뭔가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네가 목발에 익숙해지는 게 목적이니까. 다 너를 위한 거야.”

“...다녀올게요.”

낸시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로드리고는 안심한 표정으로 에린 앉아있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무척이나 반가운 손님이었지만 지금은 에린이 빨리 다시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낸시가 다시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에린은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새끼가 잘생겨서 그런지 그 모습만으로도 조금 그림이 된다.

로드리고는 서둘러 낸시를 방 밖으로 내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새끼...대체 왜 온 거야?

빨리 용건을 말해야 할 것 아니야?

이대로 있다가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아 결국 로드리고는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기...뭔가 고민이라도 있어?”

걱정스런 어투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는 에린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있으면 돌아올 낸시를 걱정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듣는 에린의 입장에서는 친구를 걱정하는 로드리고의 어투에 조금 감동하고 만다.

“아! 미안...미안해. 잠시 생각하느라...”

“그러니까...고민이?”

빨리 결론을 듣고 싶은 로드리고.

하지만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는지 에린은 다시 뜸을 들인다.

아! 이 새끼 졸라 우유부단하네!

그냥 팍하고 용건 말하고 꺼지란 말이야!

그러니까 친구가 하나도 없지!

내가 첫 친구면 볼장 다 본거 아니야?!

새끼가 정말 얼굴만 빼면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다니까.

그에 비하면 내가 훨씬 낫지.

낸시 그 계집애 남자 보는 눈이 완전 똥이야! 똥!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렇다니까.

확실히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하는데...내가 마음이 약하니까...

“로드리고. 저기...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 솔직히 숨기고 싶지만 친구라면...진정한 친구라면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심각한 에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로드리고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뭐야?

이 새끼...이거 설마...아니지?

좀 곱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래도 모르잖아?

귀족들은 그런 놈들이 많다니까.

로드리고는 서둘러 손을 들어 올렸다.

“친구 사이라고 해도 전부 말할 필요는 없어. 나는 네가 무슨 비밀을 안고 있든지 상관없어. 네가 불편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에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여기를 떠나면 더 이상 만날 일도 없는 놈이다.

그렇지만 낸시...너도 참...원래부터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이래서는 완전히 불가능하겠네.

크....크크큭!

크크큭!

갑자기 너그러워지는 로드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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