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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35화 (135/200)

00135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그렇게까지 말해주다니...정말 고마워. 하지만 이건 말해야만 해.”

굳이 놈의 커밍아웃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놈이 기어코 하겠다는데 그걸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다.

“뭐...네가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면...”

“실은...”

그리고 그렇게 에린은 크레이머 남작이 시켜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엔 뜸을 들인다고 생각하며 지루하게 생각했던 로드리고는 그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날 납치하려고 했단 말이야?

이거 참...세상이 만만치 않구나.

그런데 뭐야?

이놈은 그걸 안하겠다고 말하고 아버지와 연을 끊었단 소리야?

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짓을 해?!

영지 있는 귀족이 장난이냐?! 응?!

새끼가 착한 거야, 미련한 거야?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로드리고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기를 위해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셈이니까.

그런데 대륙 10강이랑 인연이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풍기면 아무도 못 건드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구나.

너무 나댄 모양이야.

검의 신전에서 수련하면 강해지는 거야 확실하지만 아직 마음 놓아도 될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닌데...

그리고 수련하러 간지도 오래되었고.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아무런 말이 없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던 에린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이렇게 사과할 테니 아버지를 용서해줘.”

“아니...뭐...그런 걸 가지고...됐어. 그러니까 그러지 마. 자, 어서!”

로드리고는 에린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기...혹시 말이야. 크레이머 남작님이 다른 뭔가를 하진 않을까?”

그 말을 듣고 에린이 눈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로드리고는 깜작 놀라 조금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새끼가 뭐냐?!

해보겠다는 거냐?!

응?!

그러나 에린은 로드리고의 우려와는 다르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내가 너를 지키겠어!”

지키긴 뭘 지켜. 나보다도 훨씬 약한 새끼가...

그래도 뭐, 아무리 연을 끊었네 뭐네 해도 아들이니까 저놈 뒤에 숨으면 큰일은 피할 수 있겠지.

“그..그것 참 든든하네.”

입에 발린 소리였지만 에린은 얼굴을 붉히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로드리고는 참 단순한 새끼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럼 에린은 갈 데가 없잖아? 혹시 나를 따라다닌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이건 미리 못 박아 둘 필요가 있겠는데...

아무래도 낸시 계집애가 지조 없이 놈에게 코딱지만큼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까...

나는 딱히 상관없지만 그래도...젠장...

그래도 놈이 없으면 크레이머 남작이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 때 막아줄 놈이 없으니까.

이거 미치겠다.

일단 자작성을 떠나야 할까?

아니야. 그랬다가는 더 위험해지지.

여긴 자작의 기사나 병사들이 잔뜩 있지만 밖은 그야말로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에린을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잖아?

놈은...아무튼 귀찮으니까.

절대 낸시 때문은 아니고.

그냥 대륙 10강중에 아무나 한 명 대고 그가 내 스승이라고 해버릴까?

그럼 간단한 거 아니야?

그렇지만 그러면 일이 더 커지는 거 아닐까?

까짓 거 내가 대륙 10강만큼 강하면 무서울 거야 없겠지만 언제 그렇게 강해지냐고?!

그러기에 그렇게 나대는 게 아니었는데...그냥 적당히 져줬으면 좋았을 텐데...

딱히 위험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크레이머 남작인가 그놈은 좀 위험하게 치고 들어오긴 했지만 애초에 에린한테 져줬으면 남작하고 겨룰 일도 없었고.

그렇지만 그러면 비욘느가 에린하고 결혼해 버렸을 테니까 그럴 수도 없잖아!

아니야.

이미 다 지나가 버린 일인데 후회만 해서 뭐한다고...

일단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

옆에 멀뚱히 서있는 에린을 돌아보자 그가 조금 쭈뼜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로드리고.”

“응?”

“솔직히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래서 말인데 네 여행에...”

로드리고는 순간 에린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할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에린! 아버지와 화해해야지!”

“뭐?”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친구가 나 때문에 아버지와 연을 끊으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는 나를 그런 놈으로 생각한 거니?!”

별로 상관없었지만 로드리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에린을 다그쳤다.

그러자 에린은 당황해서 말했다.

“그...그렇지 않아. 하지만 아버지는...”

“이 세상 누구든 부모 자식 간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이야. 그렇지만 갈등이 있다고 인연을 끊고 갈라서지는 않아. 나도 아버지께서 얼마 전 하신 일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아버지는 아버지잖아?”

물론 로드리고는 아버지와 연을 끊지는 않았지만 가출해 버렸다.

그다지 에린보다 나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선 어차피 에린은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어!”

에린은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드리고도 물러날 수는 없다.

놈을 여행길에 데려갈 수는 없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된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여행을 한단 말인가?!

“나 역시 친구를 아버지와 갈라서게 할 수는 없어. 그러느니 네가 나를 배신하는 것이 더 나아!”

“로드리고...”

에린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본다.

같은 남자가 그렇게 자기를 쳐다보자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얼굴을 찡그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로드리고는 에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스승님에 대해서 말해 줄 수는 없어. 나는 아는 것이 없으니까.”

“응! 믿어. 나는 로드리고의 말을 믿어.”

에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중요한 것은 내 스승님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야.”

“나는 그런 건 이제 신경 쓰지 않아.”

로드리고는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 에린의 뺨따귀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너희 영지에 빚이 많다는 이야기잖아? 그걸 위해서 애초에 브라우닝 영지로 온 거고 말이야. 비록 일을 그르치게 되긴 했지만.”

“응. 원래는 비욘느 영애와 맺어질 예정이었으니까.”

놈의 말을 들으며 이마에 조금 핏줄이 선다.

어쨌든 로드리고가 한평생 바래왔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들어봐. 결국 혼약이 되든 안 되든 그런 건 떠나서 자작님에게 다시 원조를 받게 되면 전부 해결되는 거야. 그렇지? 그렇게만 되면 크레이머 남작님과도 다시 화해할 수 있을 거고.”

“그렇지만 그런 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 이미 자작님과 아버지는 다투신 모양이고.”

젠장...벌써 거기까지 진행된 거냐?!

그래도 뭔가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냥 대륙 10강 아무나 지껄여 대고 남작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이만저만 골치 아프게 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어차피 남작 입장에서는 문제가 전부 해결된 거니까 에린도 데리고 돌아갈 텐데, 그럼 에린놈하고 여행을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건 아무튼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두자.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자작님을 만나겠어!”

“로드리고...그렇게까지...”

그럼 어떻게 하냐?!

어차피 원조한다고 해도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번 말해보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튼 네놈이 따라온다고 하니까 일이 이렇게 귀찮아 지는 거 아니야?!

에린은 갑자기 로드리고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소리쳤다.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어!”

이 극단적인 새끼...정말 가지가지 하네.

보통 피곤한 게 아니야.

“은혜는 무슨 은혜? 그냥 한 번 만나본다는 것뿐인데. 해결된 것도 아니고.”

“아니야! 나는 믿어. 로드리고는 분명 이 일을 해결해 줄 걸 말이야.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길 정말 잘했어. 나는 그저 네가 떠나는 여행길에 동행할 생각밖에 하지 않았는데...아버지를 속으로 비난하며 자기 연민에 빠졌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이렇게까지 자기 일도 아닌데 도와주려 하다니...”

역시나 따라올 생각이었어. 이새끼...

그나저나 부담 엄청 주는데?

그냥 만나보고 안 되면 말려고 그랬는데 말이야.

그런데 만나면 뭐라고 하지?

‘자작님, 부탁이니까 남작님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되나?

아~! 그럴 리가 없잖아!?

갑자기 괜히 그런 소리를 한건 아닌지 후회하며 로드리고는 억지로 에린을 바닥에서 일으켰다.

아무튼 뭔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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