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6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입술을 질끈 깨물고 오랜만에 머리를 굴려본 로드리고는 자신의 머릿속이 완전히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무지 방법이 없다.
어두운 밤에 잃어버린 검은 개를 찾는 격이었다.
에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전설속의 영웅이라도 보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지만 부담만 커진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그럴 경우 아무튼 낸시는 데려가야 하는데 그러면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자작을 만나 내가 콧물을 훌쩍이며 눈물로 호소해도 한두 푼도 아닐 텐데 남작을 도와줄리 없다.
게다가 다퉜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더 싫겠지.
크레이머 남작...그러기에 왜 돈을 빌려가지고...
사채와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인 것을...
뭔가 대단한 던전 같은 거라고 발견되면 완전 부자 되서 갚아버리면 되겠지만...던전이 어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도 아니고 말이야...
잠깐!
던전~~~!
그렇지 던전!!!
여기 주변에서 던전 발견 되었던 것 있지 않았었나?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발견 되서 잠깐 화제가 되었을 텐데...
파보니까 부장품이 쓸모없는 것이라 영지가 발굴 비용을 감당 못해서 폭삭 망해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던전은 던전이니까.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아직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그게 어디서 발견 되었더라?
...아! 크레이머! 많이 들어봤다고 했더니 그거였네!
아마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었다면 브라우닝 가문과 크레이머 가문은 협력 체제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게 비욘느와 에린의 약혼으로 이어졌겠지.
그리고 브라우닝 영지에서 원조를 받은 크레이머 남작이 근근이 버티다가 던전에 올인하고 망해버린 거지.
별 볼일 없는 던전이었으니까.
브라우닝 영지도 밑 빠진 독에 물붓다가 살림이 어려워졌고.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와서 완전히 꼬여버린 거네.
뭐 어차피 망할 거였지만 좀 더 일찍 망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브라우닝 자작에겐 잘된 일이고 말이야.
하지만 이대로는 내가 곤란해 졌으니까 그냥 원래대로 굴러가게 손을 써야겠어.
아무튼 던전이라면 자작도 흥미를 보일 테니까.
마침내 로드리고가 싱긋 웃으며 에린에게 말했다.
“가보자. 이렇게 기다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내가 어떻게든 자작님과 담판을 짓겠어!”
그렇게 둘은 방을 나섰다.
로드리고는 지나가는 집사에게 물어 자작이 집무실에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자작님을 만나볼 수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자작님께 로드리고의 말을 전해주겠다고 답했다.
로드리고와 에린은 집사를 따라갔다.
만약 자작이 만나주겠다고 허락하면 곧바로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집사는 로드리고와 에린을 기다리게 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에 다시 문이 열리며 집사가 말했다.
“만나주시겠답니다. 이리로.”
그런데 에린도 따라 들어가려고 한다.
로드리고는 손으로 그를 막으며 말했다.
“잠깐! 여기는 나 혼자 들어가겠어.”
아무래도 크레이머 영지 내에 있는 던전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곁에서 에린이 그걸 듣는다면 좋게 생각할리 없다.
고로 그를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로드리고가 딱히 이유를 설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린은 혼자서 뭔가 결론을 내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네가 나올 때 까지 말이야. 우리 집안일을 너에게 전부 맡겨야 한다니...면목이 없어.”
그래. 면목이 없을 만 하지.
내가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딱히 갈 곳도 없을 테고, 가봤자 내 방에 가있을 것이 뻔한데 그랬다간 또 낸시 계집애랑 한방에 있게 될 것 아니야?
고 계집애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러느니 그냥 여기 붙잡아 두는 편이 좋겠어.
“그래. 함께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네가 여기서 나를 기다려 준다면 큰 힘이 될 거야. 부탁할게. 그러니까 방 말고, 바로 여기.”
로드리고가 진지한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에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절대로 문 앞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로드리고는 자작을 만나러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넓고 화려했다.
바닥에는 붉은색 융단이 깔려있고, 가구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벽면에는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책들이 가득히 꽂혀져 있었고, 멋진 풍경화도 그 맞은편에 걸려있다.
돈이 좋기는 좋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던 로드리고는 자작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보였다.
자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어서 오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나?”
“저기..아침나절에는 죄송했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누가 보기에도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적어도 로드리고가 그때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만은 자작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하하!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개의치 않는다네.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무슨 일 때문인가?”
자작의 물음에 로드리고는 몇 번이나 입에 침을 바르며 뜸을 들였다.
“자작님, 크레이머 남작과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작은 딱히 비밀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야.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닐세. 게다가 귀족 가문에서는 어려서 혼담이 좀 오갔다고 해서 그게 영애의 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작은 여전히 비욘느와 로드리고의 사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자작님, 제가 주제넘지만 한마디 드려야겠습니다.”
“하하!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크레이머 남작을 도우셔야 합니다. 이미 그에게 언급하셨던 원조를 그대로 하십시오.”
자작의 살짝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자네 말대로 정말 주제 넘는 말이군. 자네가 검술에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내가 인정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야. 브라우닝 영지의 운영에 관여하고 싶다면 그만한 명분을 가져야 한다네. 예를 들면...한 가문이 된다던가 하는 그런 것 말일세. 물론, 명분을 얻더라도 충분히 성장한 이후가 되겠지만. 아직 어린 자네의 말에 따라야 할 이유를 나는 조금도 찾지 못하겠군.”
로드리고도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었다.
그도 자주 생각한다.
어린애가 뭘 알까?
자기만 해도 곡물을 싣고 상행을 나갈 때, 아직 어린 아들놈이 마차를 가로막고 오늘 가지 말고 내일 가라고 말했다면 흠씬 두드려 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 날 수도 없었다.
원래 사람은 궁지에 물리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무사히 빠져나갈 구멍은 확보해야 한다.
남작이 한숨 돌리게 되면 그때 소리 없이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크레이머 가문도, 그리고 브라우닝 가문도 폭삭 망하게 되어 있다.
딱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냥 정해진 수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뿐이니까.
물론, 나중에 비욘느가 그의 이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때는 조셉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나서서 도와줘야겠지만 지금은 그냥 꼬꼬마일 뿐이다.
“자작님, 제가 주제넘은 말은 한 건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레이머 영지에는 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드리고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로드리고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말인가?”
“확실합니다. 제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니까요. 정확한 위치까지는 모르지만 지브릴 협곡 내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네의 스승? 흐음...그럼 이참에 말해보게. 자네의 스승은 대체 누군가?”
“그건 저도 잘...”
“이보게 자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잘 새겨듣게. 누군가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네. 그걸 주지 못하면 거래는 성립하지 못하지. 자네가 정말 스승의 이름을 모른다면 그 생김새라도 말해보게.”
젠장...
브라우닝 자작은 생각 외로 깐깐했다.
하긴...넓은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 주먹구구식으로 하진 않을 테니까 오히려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자작이 계속 말을 이었다.
“던전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일세. 하지만 발굴품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도박이나 다름없는 짓이야. 게다가 나름대로 조사해보니 크레이머 영지는 사정이 정말 좋지 않더군. 나는 모험을 할 수는 없네. 이런 위험을 전부 감수할 만한 가치가 거기에 있단 말인가?”
“저는...”
“하지만 자네에게는 있겠지. 스승을 알려주게. 왜 크레이머 영지를 도우려는지 모르겠지만 내 위험을 감소시켜주지 않는 이상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