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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37화 (137/200)

00137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던전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턱도 없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아무나 하나 이름을 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대상도 대륙 10강이니까 10명이나 된다.

유명하니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면 대륙 10강 중 하나에게 본보기로 순살 당할 우려가 있다.

마치 노예가 자기는 국왕과 같은 혈육이라고 거짓말 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자작이나 남작은 어차피 곧 패가망신하겠지만 10강은 오래오래 가니까 조심해야만 했다.

애초에 이런 건 로드리고가 잘 못하는 일이다.

영주를 상대로 장사해 본적도 없다.

잘하는 일이라고는 만만한 놈에게 곡물 가격을 높여 받으려고 배짱을 튕기던 것밖에 없었다.

이건 로드리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잘 안되었다고 말하자.

이런 일에 목숨을 걸 수는 없다.

에린에게 그렇게까지 할 의리 같은 건 없다.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니까 에린이나 크레이머 남작은 후로도 일반 평민들이 보기에는 부자로 살지도 모르고 말이야.

나 같은 것이 괜히 생각해줄 필요는 없겠지.

몰락 귀족의 삶이 썩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못살 정도로 끔직한 것도 아니다.

내가 한평생 이미 살아봤으니 알 수 있다.

뭐, 비교 불행이야 어쩔 수 없지만...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마지막으로 허세라도 좀 떨어보자.

내가 잘하는 것...배짱 튕기기다.

이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까.

“뭐, 관심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저는 전부 자작님을 생각해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크레이머 남작과 자작님은 좋은 협력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크레이머 남작을 도우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셨나요? 그건 에린 크레이머와 제가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편하게 되어버린 남작과 자작님의 사이를 중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거절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가 제 한계라면 그 이상 무리하며 자작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크레이머 남작은 다른 협력자를 찾는 수밖에 없겠군요. 다만 조심하십시오. 남작가가 힘을 얻게 되면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일을 잊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그저 던전 개발에 참여하지 않는 것뿐인데 말일세. 거기에 원한 따위는 조금도 생길 여지가 없어.”

“아니요. 자작님은 현재 남작가의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아시고 거의 약속되었던 원조까지 없던 일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작의 분노가 상당합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나중에 분명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겁니다. 아니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건 단순히 제 생각일 뿐이니까요.”

로드리고는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작이 로드리고의 팔을 잡고 다시 앉혔다.

자작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남작과의 마지막이 좋지 못했다.

무례하고 감정적인 그의 행동에 나도 욱하고 말았어.

앙심을 품었다고 볼 수밖에...

이미 끝이 난 가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혹 던전에서 값진 유물이라고 발견되면 상황은 순식간에 돌변할 수 있다.

상황을 보면 저 꼬마는 스승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조금 더 압박을 가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던전이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남작은 내게 비밀로 하고 던전을 발굴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그것의 가치를 알 길은 없지만 내게 원조를 받을 계획이었으면서 뒤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군.

던전이라...잘만 되면 판도를 크게 뒤집을 수 있겠지만 만약 별것 없다면 헛물만 켜게 될 텐데...

자작의 모습을 살피던 로드리고는 그가 고민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쯤에서는 좀 강경한 모습을 보여야 먹히곤 한다.

로드리고는 다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린에겐 새로운 협력자를 찾으라고 말해줘야겠군요.”

자작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확실한 일은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지.

게다가 나는 아직 저 소년과 비욘느를 엮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소년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에린 크레이머 공자와 친구사이라고 말이야.

그가 크레이머 남작가로 떠나겠다고 하면 나는 막을만한 명분이 없다.

그건 대륙 10강 중 하나와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날리는 것과 같아.

던전이 제대로 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은 지르고 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렇다고 남작에게 너무 많은 원조를 약속할 수는 없어.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저 소년과의 연을 위해 적당히 원조해 주어야겠군.

“좋네. 아직 어린데 여간 내기가 아니군. 자네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나를 움직였다네.”

로드리고는 자작의 말에 빙그레 웃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까고 있네.

그냥 놓치기 아까우니까 어떻게든 한발 걸치려는 걸 모를 줄 알고?

그러나 그 정도면 나에게는 충분하지.

“그럼 자세한 일은 다시 남작과 이야기하시는 편이 좋으시겠군요. 남작에게는 제가 직접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한가? 아직 어린데 그런 일을 하려면 힘들지 않겠나? 내가 집사를 시켜 전할 테니 그런 건 이제 묻어두고 산책이라도 하지 그러나? 내가 비욘느에게 성을 안내해 주라고 말해두겠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자작을 보며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아무래도 그건 제가 직접 전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습니다. 자작님의 호의는 소식을 전한 후에 받아들이도록 하죠.”

남작은 던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해두지 않으면 지금까지 한 일이 쓸모없게 되어 버린다.

어떻게든 자작보다 남작을 먼저 만나야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방금 이야기한 건 꼭 지켜주었으면 좋겠군. 비욘느에겐 미리 말해둘 테니 적당한 시간에 내 딸이 자네를 찾아갈 걸세.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 성은 멋진 곳이 꽤 많네. 어두워질 때까지 산책을 해도 지루하지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로드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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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을 거슬러 로드리고가 집무실에 들어간 직후로 돌아가 보자.

에린은 로드리고에게 했던 약속대로 집무실 앞을 떠나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한 켠에 서서 그를 생각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우정이란 말인가?

지금껏 내가 외로운 삶을 보낸 건 이런 값진 만남을 위해서였던 거야.

에린이 혼자서 전율을 불태우며 감동을 느끼고 있을 때, 한 소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에린 공자님, 여기서 뭐하세요?”

그가 자세를 바로하며 고개를 돌리자 로드리고가 낸시라고 소개했던 소녀가 서있었다.

“아! 레이디 낸시.”

낸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저는 레이디가 아니에요. 그냥 허드렛일 하는 계집애인걸요. 그렇게 부르시지 않으셔도 되요.”

하지만 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디는 레이디입니다. 무엇보다 제 친구인 로드리고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제가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요.”

순간 낸시는 사래가 들린 듯 몇 번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도...도련님이 절 소중히 여기신다고요?”

어이없다는 투가 역력했지만 에린은 눈치 채지 못하고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아침나절에도 레이디께서 눈에 보이지 않자 직접 성을 돌아다니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소중히 여긴다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소중히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그냥 시킬 일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니면 심심했거나...”

“하하. 레이디는 유머 감각이 있으시군요.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도무지 어디가 재미있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낸시는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어딘지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가 하염없이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공자님은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방에서 도련님과 같이 있지 않으셨나요?”

“그랬죠. 하지만 제가 친구에게 부끄러운 고백을 했더니 그가 제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작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저의 가문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와 아버지 사이에 생긴 다툼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의 그런 고결한 인품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레이디는 그런 사람의 아낌을 받고 있으니 정말 행복하시겠습니다.”

낸시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간신히 말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이 이 안에 계시다구요?”

“그렇습니다. 저는 제 일임에도 그에게 맡기고 이렇게 기다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군요. 아아...나란 인간은 얼마나 무능한지...처음엔 그의 검술에 감탄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검술은 그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아! 그보다 레이디는 어째서 여기에...?”

“저는 아시다시피 뭔가 마실 거라도 얻으러 갔다가 여기로 돌아오게 되었을 뿐이에요. 여기가 더 가까우니까. 조용히만 다니면 집무실 앞을 지나가도 상관없다고 들어서요. 하지만 마실 것은 얻지 못했어요. 목발 때문에 가지고 오기 힘들 거라고 해서요. 주전자를 직접 들어보니까 확실히 저한테는 무리였고요. 그래서 그냥 찻잎하고 간단한 다과만 얻어왔어요. 물은 방에도 있으니까요.”

“이런...괜한 일을 부탁드렸습니다.”

에린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낸시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리고...저한테 시킨 건 에린 공자님이 아니고 도련님인걸요.”

“...흐음...제가 로드리고에게 낸시 양의 고충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는 당신을 아끼니 제가 차근차근 말하면 앞으로는 무리한 일은 시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리한 일이 아니에요. 그게 제 일인걸요. 그걸 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요. 공자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제 일을 할 거예요. 지금은 다리가 이렇게 된 게 익숙하지 않아 요령이 없을 뿐이에요. 그리고 계속 다리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요령이 없는 채로 남게 될 거예요. 저는 그런 건 싫어요. 제 한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있을 곳이 없으니까요.”

“아! 레이디...”

에린은 왠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가슴에 와 닿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낸시의 손을 잡고는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므아아앗~~!”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당황한 낸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낸시는 서둘러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에린은 그 손을 놔주지 않았다.

그는 낸시를 올려다보며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로드리고가 당신을 아끼는지 알겠습니다. 당신은 고귀하고 훌륭한 레이디입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낸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소...손 놔 주세요. 이..이런 건 곤란해요.”

낸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주변에 또래 사내아이라고는 토미나 로드리고 정도밖에 없었던 낸시로서는 동화에나 나올법한 미소년이 달콤한 목소리로 칭찬하며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를 해주는데 내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녀의 가슴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고동쳤다.

조금 더 손에 힘을 주고 빼내면 될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람?

에린은 낸시를 향해 꿈결 같은 미소를 띠우고 다시 한 번 그녀의 손등 위에 키스했다.

“앗!”

하지만 그 키스는 무척이나 짧았다.

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낸시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에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있었지만 낸시의 심장 고동은 여전히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대체 뭘까?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 건 흔한 일일까?

괜히 내가 너무 의식하는 걸지도 몰라.

분명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겠지?

‘므아아앗~!’이라니...그게 대체 뭐야?!

나는 몰라.

그렇다.

로드리고는 목석같다고 낸시를 놀렸지만 그녀도 지금은 꿈 많은 소녀다.

멋진 왕자님을 향한 꿈을 그녀 역시 한 번쯤은 꾸어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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