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어?”
로드리고가 묻자 낸시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예? 뭐...뭐가요?”
“왜 네가 여기 있냐고?”
“그..그게...지나가다보니까...에린 공자님이 보여서...그래서 제가...그런데...그게...”
“뭐?!”
로드리고가 재차 묻는다.
낸시는 차분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손등에 남겨진 에린의 입술 감촉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촉촉하고 뜨겁다.
꿈결 같던 목소리가 귓전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다.
그녀의 당황이 오래 지속될수록 로드리고의 짜증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에린이 끼어들었다.
“로드리고, 낸시 양은 내 말상대를 해주고 있었을 뿐이야. 그보다 자작님과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어?”
로드리고는 조금 더 추궁해보고 싶었다.
낸시 저 계집애가 평소랑 다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보통 때라면 한숨부터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을 텐데 지금은 저게 뭐란 말인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인다.
로드리고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에린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순진한 표정으로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싶어 할 뿐이었다.
분명 뭔가 있다.
하지만 자작의 집무실 앞에서 소란을 떨 수는 없다.
젠장...
그래도 설마 저런 순진한 표정으로 낸시에게 작업을 걸고 있지는 않았겠지.
일단은 남작을 만나자.
전후 사정을 알려줘야 할 테니까.
사정을 알아보는 것은 그 후에도 늦지 않아.
“낸시, 너는 방으로 가 있어. 나는 크레이머 남작님을 만나고 갈 테니까.”
“아! 예! 아..알았어요!”
낸시가 허둥지둥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로드리고에게 에린이 다시 말했다.
“아버지를 만난다고?”
“응.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겠어. 아무래도 여긴 좀 그러니까 말이야.”
“아! 그도 그렇군. 내 마음이 너무 성급해서...”
로드리고는 낸시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린을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자작과 나눈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던전이라고?!”
에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드리고에게 물었다.
“그래. 스승님이 말해준 거니까 확실해.”
“하지만 던전이 있다면 아버지는 자작의 원조를 받으려 하지 않을 거야. 그것만 있으면 이 위기를 해결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에린, 모든 던전이 일확천금을 약속해 주는 건 아니야.”
“그 말은?”
“일단 남작님을 만나자. 자작님과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드리려면 서둘러야 해.”
“그렇지만...”
“네가 아버지와 사이가 껄끄러워 진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신경쓰며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는 없어.”
“그래. 네 말이 맞아.”
어느새 남작의 방문 앞에 도착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서 남작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 에린입니다.”
그가 말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들이 없다.”
“......”
에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로드리고가 서둘러 말했다.
“저 로드리고도 함께 왔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렸다.
남작은 정말로 문 앞에 로드리고가 서있는 것을 보고는 희색을 보이며 둘을 방 안으로 들였다.
그는 에린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이렇게 할 줄 알았다. 하하하! 그래, 자네의 스승은 누군가? 응? 우리를 따라 남작가로 따라올 테지?”
그의 성급한 질문에 에린은 자신을 안은 아버지 품에서 빠져 나오며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
“그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크레이머 남작의 표정이 다시 심각하게 변한다.
“로드리고는 정말로 스승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흥! 그렇다면 여기에는 뭐 하러 다시 왔단 말이냐?!”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에린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지켜보았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로드리고는 에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남작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흥! 나는 바쁘네. 누군가 간단한 사실 하나를 숨기고 있어서 말일세.”
순간 로드리고는 남작에게 죽방을 한 대 먹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는 정말로 제 스승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하지만 남작님, 따지고 보면 제 스승님의 성함을 알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비밀이네.”
남작은 빚에 허덕이고 있는 사실을 로드리고에게 말하기는 창피했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자존심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로드리고는 진지한 표정을 애써 지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에린이 말해 주었으니까요.”
남작은 매서운 눈초리로 에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이 기어코?!”
“이미 저를 납치할 생각까지 하셨던 남작님이 지금 와서 체면을 세우려고 노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남작은 시선을 에린에게서 로드리고에게로 돌렸다.
“알량한 검술을 믿고 개처럼 짖어대는구나! 어차피 네놈은 스승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네놈을 죽여도 그가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걸 모르느냐?!”
“저에게 화를 내신다고 잃어버린 명예가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작님을 조롱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이미 네놈은 나를 조롱하고 있다. 천한 놈이...!”
“뭐, 저보다 훨씬 고귀하신 남작님께서 저를 천하다 하시면 제가 딱히 반박할 말은 없지요. 하지만 남작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흥! 좋다. 하지만 마음이 들지 않는 말이 나온다면 언제고 네놈을 베겠다.”
“좋습니다. 그런다고 제가 베일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네놈이!!!”
기어코 남작은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그가 잡은 검 손잡이를 잡고 다시 밀어 넣었다.
“일단 들어보십시오.”
싱긋 웃는 그를 보며 남작은 화가 치밀었지만 실제로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벨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 수 없는 그의 스승이 무섭기도 했다.
그는 한 번 더 참아준다는 표정으로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그제야 로드리고는 자작과 나눴던 대화내용을 이야기했다.
남작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던전이란 말이냐?! 그게 정말이냐?! 네 스승이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잡아먹을 것처럼 흥분해서 로드리고의 어깨를 잡고 상정 없이 흔들어 대는 남작의 손을 일단 밀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작님도 원조를 약속하셨고요.”
“흥! 던전이 있다면 자작의 원조 따위는 필요 없다. 지브릴 협곡이라...크크큭!”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를 봤나?
뭐,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말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게 빛 좋은 개살구니까 아무짝에도 소용없거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나 몰라라 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망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남작가만 망하겠지.
자작가는 조금도 피해를 보는 것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비욘느가 내가 꿈꾸고 여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진다.
지금도 외모만 봐서는 확실히 미인이 될 상이지만 그래도 그 기품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자작가도 같이 망하는 편이 좋다.
그런 건 누가 억지로 가르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힘들어 졌을 때, 내가 짠하고 나타나서 도와주면 그야말로 왕자님이 따로 없겠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얻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런 미완성품의 비욘느에게 흥미가 있을 리 없다.
“남작님, 하지만 그 던전은 사실 그다지 소장품이 없습니다.”
“뭐라고?!”
기쁨이 가득하던 남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만다.
“다시 말씀 드리죠. 던전은 가치가 없습니다. 스승님이 그 던전을 탐험해 보지 않았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 혹시 너의 스승이란 자가 가치 있는 것을 전부 빼돌린 것은 아니냐?! 남작가 내에 있는 던전이거늘!!!”
“그런 모욕은 기분이 상하는 군요. 제 스승님은 도둑이 아닙니다.”
로드리고가 남작을 노려보며 말하자 그도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로드리고를 몰아세우지 못했다.
“아무튼 남작님은 자작가의 원조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던전의 가치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요. 자작님에게도 이미 말해두었으니 그분은 분명 던전에 대해 언급하실 겁니다. 원조 받은 돈을 어떻게 사용 하실 지는 남작님 마음이겠지만 던전을 개발하는 흉내 정도는 내셔야 원조가 계속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