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9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남작과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하자 에린이 로드리고를 따라 나서려 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말렸다.
“넌 여기 있어야해.”
“로드리고...”
오늘은 피곤하다.
어서 방에 가서 쉬고 싶다.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어울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에린은 로드리고의 그런 행동을 오해했다.
자신이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가 된 것 때문에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표정이 감격으로 물드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로드리고는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 표정을 봤더라도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낸시가 테이블에 다과와 차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드리고는 대충 자리에 앉아 쿠키 하나를 집어 먹었다.
낸시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물었다.
“에..에린 공자님은요?”
“방에 있겠지. 뭐.”
“그..그렇죠!”
“...너 좀 이상하다?”
“제가요?!”
“응. 아주 많이 이상해.”
“저..저는 모르겠는데...?”
“그래? 그럼 됐고.”
“......”
미묘한 분위기가 방안을 흐른다.
로드리고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년...저거 에린 그 새끼 좋아하는 거야.
분명하다고.
뭐? 넌 모르겠다고?
웃기지도 않네.
계집애...저걸 그냥 둬야 하나?
집무실 앞에서 에린 새끼랑 뭘 한 거야?
내가 집무실 안에서 자기네 집안 때문에 끙끙대며 자작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을 때, 밖에서 설마 알콩달콩 하고 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새끼는 양심에 털 난 놈이다.
물론, 놈이 의도해서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수도 있지.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어도 저 멍해 보이는 낸시의 콩깍지는 쉽사리 벗겨지기 힘들 것 같아.
정황상 여기서는 낸시의 볼기짝을 때려줘야 할 것 같지만 참자.
그래봤자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밀폐된 공간도 아니었어.
해봤자 이야기 조금 했을 뿐일 거야.
거기서 뭔가 므흣한 뭔가를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래. 내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좀스런 남자는 아니잖아?
이럴 때는 남자의 아량을 보여줘야 해.
“낸시야, 목발을 쓸 만 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닭살을 긁어대야 할 것 같은 상냥한 목소리다.
그러나 낸시는 그것도 깨닫지 못했는지 조금의 딴지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아! 예. 좋아요.”
“그것 참 다행이네.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 고칠 곳은 고쳐야 앞으로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알았어요.”
알았다고?!
그게 다냐?! 지금?!!
내가 상냥하게 대해주고 있는데 알았다고 말하고 그냥 끝?!
게다가 나는 눈치 챘다!
방금 조금 짜증난다는 투였어!
그렇지?!
빨리 에린 새끼가 있는 곳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뭐,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우리 낸시는 아주 똑 부러지니까. 그렇지?”
“예...”
“......”
“그럼 내일쯤 마을로 돌아갈까?”
“내일이요?! 하지만 분명히 내일은 안 된다고...”
로드리고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토록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마을이다.
이 계집애야~~~!
그런데 지금은 좋아하기는커녕 아쉬워해?!
낸시, 나는 정말 섭섭하구나.
어쩌면 나한테 이럴 수 있니?
나는 너를 위해 가출까지 했는데...
그런데 너는 지금 조금 잘생긴 사내 새끼 하나 때문에 나를 배신하려 해?!
물론, 내가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평생 돌봐줄 용의는 있단다.
예를 들면 옛정을 생각해서 첩 정도의 자리는 생각해 뒀단 말이지.
첩이라면 싫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 첩 자리는 굉장히 레어한 자리야.
왜냐면 나는 비욘느가 내 이상의 모습으로 자라면 그녀를 도와주고 아내를 삼을 예정이야.
조셉이 이 여자 저 여자 찝쩍거렸지만 나는 비욘느만 사랑하겠다고 다짐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옛정 때문에 이런 내 각오를 조금 수정해서 너까지는 첩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지.
알겠니?
이건 내 신념을 수정하는 아주 힘든 결정이었는데...
그런데 너는 에린의 얼굴만 보고 이렇게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구나.
그래도 뭐, 빨리 그 자식에게서 멀어지면 그 마음도 차차 식어버릴 거라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나는 얼마든지 에린 놈의 나쁜 점에 대해서 너에게 말해줄 용의도 있어.
그것이 너의 외도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놈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흉이란 건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다지 곤란한 일은 아니지.
“원래 일정은 바뀌게 마련이니까. 너를 위해 내가 조금 힘을 썼지.”
“...그..그렇지만...”
“나는 네가 좀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내가 잘못한 건가? 응? 뭐가 우리 낸시 생각을 바꾸어 놨을까?”
로드리고의 물음에 낸시는 양손을 저으며 말했다.
“바..바뀐 것 없어요. 얼마나 좋은데요.”
“하지만 조금도 좋아하는 표정이 아닌데?”
“그..그렇지 않아요. 자! 봐요. 웃고 있잖아요?”
낸시야, 입만 벌리고 좌우로 벌린다고 웃는 것이 아니란다.
그 어색한 표정은 대체 뭐냐?
로드리고는 아무래도 에린 흉보는 걸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에린이 네 이야기 하더라.”
“에..에린 공자님이요?!”
“응! 아까 너 입 냄새가 엄청 심했대. 그리고 목발 짚고 다녀서 그런지 땀 냄새도 심하고. 그래서 너를 구린내라고 부르자고 나한테 말하던걸?”
“정말요?! 나는 몰라...”
낸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의기소침 모드로 돌변했다.
그걸 보고 로드리고는 맹렬한 분노를 경험했다.
이렇게까지 낸시가 부끄러워하고 기가 죽는 모습은 거의 본적이 없다.
저번 삶까지 전부 포함해서도 마찬가지다.
죽인다...
죽인다 에린 새끼!!!
낸시야, 입냄새 따위는 나지 않아.
입에 손을 대고 맡아보는 행동 그만 좀 하면 안 되겠니?
겨드랑이 냄새도 그만 맡으렴.
조금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목발이 익숙하지 않아서 땀이 나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굳이 말하면 나는 그 냄새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로드리고는 낸시 못지않게 의기소침하게 변하는 스스로를 느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침대에 쓰러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그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낸시도 로드리고도 대답할 기력이 없는지 멍하니 소리를 듣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니, 어쩌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몇 번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 열렸다.
습관적으로 로드리고는 시선을 그곳에 두었다.
모습을 보인 것은 비욘느였다.
예쁘게 차려 입은 모습이다.
그녀는 로드리고를 발견하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야? 있었잖아?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성안을 안내해 주기로 약속했다고 말이야. 자! 같이 가자.”
그녀는 로드리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피곤한 날이다.
그러나 더 이상 여기 있다가는 고함을 칠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비욘느의 손을 잡았다.
슬쩍 낸시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어딘지 비어버린 표정으로 로드리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는 것은 로드리고 자신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로드리고는 씁쓸함을 느꼈다.
이곳은 내가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어.
더 이상은 모르겠다.
일단 여기를 나가자.
그게 어디가 되었든지 상관없어.
비욘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정원부터 가보자. 내가 좋아하는 곳이야. 틀림없이 너도 좋아할 거야. 저녁 식사 전에 전부 돌아 보려면 바쁠 것 같아.”
“아! 예. 그럼 서두르죠. 아가씨.”
“됐어. 아가씨는. 이제 그냥 비욘느라고 불러도 괜찮으니까.”
“...비욘느...”
로드리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어딘지 자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뭘 보고 있는 것일까?
나도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아.
내가 구하는 것은 뭘까?
정말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말이야.
여기에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의 잔재가 있어.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생생히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얻으려고 했던 그 편린이 맞을까?
나는 이걸 얻으면 만족할 수 있을까?
로드리고는 다시 한 번 굳게 닫혀버린 방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저기에 뭔가를 두고 왔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 그걸 가지고 올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