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정원은 멋졌다.
나무는 푸르고, 모나게 튀어 나온 가지도 없었다.
잡초도 없다.
꼼꼼한 정원사의 손길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정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분수에 장식된 부조는 훌륭했다.
그럼에도 로드리고는 그런 것들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비욘느는 열심히 손으로 가리키며 정원에 있는 것들과 얽혀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드리고는 건성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봐! 로드리고!”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비욘느가 부른다.
로드리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비욘느를 쳐다보았다.
“재미없어?”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웃어. 그렇지 않으면 나까지 의기소침해 지는 걸?”
비욘느가 자기보다 키가 큰 로드리고의 머리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는 소리쳤다.
“그렇죠. 이래서는...아가씨는 검술에 흥미가 있다고 하셨나요?”
로드리고가 일부러 힘찬 목소리로 묻는다.
비욘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나는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모두 안 된다는 말만 하는 걸. 에린 공자랑 사이가 안 좋아 진 것도 뭐, 이것과 조금은 관련 있을지도...”
“저는 잘 모르겠네요. 검술은 힘들기만 하고,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넌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나는 아예 할 수도 없다고.”
그녀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리고가 생각하는 이상의 그녀는 검술 따위는 모르는 가녀리고 다소곳한 비욘느였다.
아마 그가 검술을 가르쳐 주게 된다면 그런 그녀의 모습을 훗날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지리라.
그러나 그 순간만은 왜인지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순간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일지, 아니면 그녀의 호의를 얻고 싶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아무튼 그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비욘느의 눈이 빛났다.
“대단한 것은 없어요. 일단 이렇게 잡아 보세요.”
“응! 이렇게 말이야?”
비욘느의 설레는 목소리를 들으며 로드리고도 의기소침해 있던 기분이 조금 풀렸다.
로드리고는 황혼의 기사에게 배웠던 간단한 자세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 대단한 자세는 아니었다.
그가 아니어도 검을 좀 잡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르쳐 줄 수 있는 기수식일 뿐이다.
그러나 비욘느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그래. 이거면 된 거 아니야?
나는 지금 그녀와 함께 있어.
완전한 비욘느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욘느인 것은 틀림없지.
아직 어리고, 말괄량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온전한 그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멀고 먼 곳에 있었으니까.
이것이 내게 어울려.
온전한 그녀를 눈앞에 두게 되면 나는 돌이 되고 말거야.
비욘느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돌아서서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지.
지금은 이걸 즐기자.
우울했던 기분도 시간이 지나면 별거 아닌 일이 되곤 하니까.
낸시 이 계집애야! 잘 보라고!
나도 예쁜 소녀랑 이렇게 놀고 있단 말이다!
이따 방에 가면 재우지 않고 하나하나 전부 이야기 할 테니까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걸?
-------------------------------------------
크레이머 남작이 말했다.
“던전이라니...지브릴 협곡에 정말로 던전이 있다면 그 규모는 상당할 텐데... 협곡 자체의 크기로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지. 어쩌면 제국이 존재하던 시기의 던전일지도 몰라. 크큭..크크큭.”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에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던전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고 말입니다.”
남작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에린을 쳐다보았다.
“흥! 그런 녀석의 말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근본도 알 수 없는 녀석이야. 알겠느냐?”
에린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던전 이야기를 꺼낸 것도 로드리고였습니다. 던전의 존재는 믿으면서 그 가치에 대해 말한 사실은 믿지 않으시다니요?”
남작이 냉소를 지었다.
“나도 전부터 그곳에는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던전의 존재를 쉽게 믿는 것이다. 다만 정황상 가치가 없다는 건 믿기 힘들지. 자작의 원조를 받아야 하다니...그래서는 분명 일정 지분 이상을 요구할 것이 자명하거늘...”
“아버지!”
“네놈은 닥쳐라. 이럴 줄 알았다면 자작 따위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골치 아프게 되었군.”
“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건방진 녀석! 지금 네 아비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나가거라! 네놈 방으로 사라져! 나는 아직 네놈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게 만들지 말거라.”
“......”
에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을 나왔다.
로드리고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이렇게까지 도와주었건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나는 왜 이리 무능하단 말인가?
방에 가서 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그건 내가 실력이 형편없어서다.
실력을 기르자.
땀 한방울이라도 더 흘려서 검을 수련하면 아버지께서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시는 시간도 더 빨리 다가오겠지.
로드리고에게 가보자.
그에게 내 검을 보고 부족한 점을 가르쳐 달라고 말해보자.
그라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 줄 거야.
그렇게 에린은 서둘러 로드리고의 방으로 갔다.
그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똑! 똑!
반듯한 자세로 서서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다시 한 번 두드렸다.
똑! 똑!
그제야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이 조금 열렸다.
문틈으로 익히 아는 낸시라는 소녀가 얼굴을 삐죽 내민다.
그녀는 에린을 발견하고는 눈에 띠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에...에린 공자님!”
“아! 낸시 양. 로드리고에게 제가 왔다고 말해주시겠습니까?”
“...도련님은 잠시 나가셨어요.”
“이런...”
에린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했습니까?”
“그건 잘 몰라요.”
낸시가 왠지 대답을 하면서도 자꾸 얼굴을 에린 반대쪽으로 돌린다.
에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것을 언급하며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아마 목발을 짚고 움직이느라 불편한 곳이 있는 모양이라고 자기 좋을 대로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런 것을 굳이 지적하며 소녀에게 창피를 주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레이디, 괜찮다면 들어가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될까요?”
에린의 말에도 낸시는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쾌한 냄새로 에린이 언짢아 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만약 나를 구린내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지?
평소라면 로드리고의 말이 그저 장난이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그저 스스로의 부족한 점이 더 크게 느껴질 뿐이었다.
“레이디?”
에린이 다시 낸시를 부르자 그녀는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한걸음 물러나 문을 열어 주었다.
에린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낸시는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에린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낸시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와 충분한 거리를 유지했다.
“낸시 양,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이리로 와서 제 말상대라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제...제가요?!”
낸시가 살짝 몸을 움츠리며 반문했다.
에린은 꿈결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낸시 양이 그래주신다면 제가 아주 기쁠 겁니다.”
“저..저는...저는 그러니까...”
낸시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날 냄새난다고 했으면서...구린내라고 말했으면서...대체 왜 저렇게 상냥하게 권하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날 놀리는 걸까?
무지한 내가 당황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말이야.
다리도 이 모양이니 반응이 하나하나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그런 건 너무 짓궂은 짓이야.
에린은 주저하고 있는 에린 곁으로 다가갔다.
지척으로 다가온 그를 바라보며 낸시는 깜짝 놀라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로 목발을 휘두르고 말았다.
에린은 갑작스런 그녀의 반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목발 가장자리에 이마를 살짝 스쳤다.
상처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살갗이 붉게 변하고 만다.
“죄...죄송해요!”
낸시가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에린의 이마를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전부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자신한테는 불쾌한 냄새가 날 테니까...
분명 화를 내겠지.
커다란 고함소리를 기다리는 그녀의 귓가로 익히 들어왔던 에린의 상냥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레이디, 제가 성급하게 다가가 놀라신 모양이군요. 사과할 사람은 레이디가 아니라 저입니다.”
“그..그렇지 않아요! 제가...제가...”
그녀의 눈에 가득 맺혀있던 눈물이 마침내 또르르 볼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에린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낸시는 놀라 흠칫하고 물러서려 했지만 다리의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침대에 넘어지고 말았다.
에린도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주려다 같이 침대에 쓰러지고 만다.
그렇게 둘의 몸이 같은 침대에 포개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