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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42화 (142/200)

00142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로드리고는 비욘느와 정원 출입구에서 헤어져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그녀와 함께한 산책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지금이라면 낸시 그 계집애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낸시 계집애는 나한테 한참동안 비욘느 아가씨께서 내게 했던 칭찬과 격려의 말을 들어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낸시도 기쁘게 듣겠지.

했던 짓이 있으니까 말이야.

아마 낸시도 아가씨께서 날 얼마나 훌륭하고 굉장하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날 보겠지.

그럼 에린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처음에는 좀 외모에 혹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남자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하찮은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거든.

흠하하하하하!

그는 노크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제켰다.

“낸시!”

큰 소리로 소리치며 들어간다.

그리고 보았다.

침대에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이 후다닥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말이다.

낸시도 그리고 에린도 옷차림이 흩어져 있다.

붉어져 있는 두 사람의 얼굴.

바닥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목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로드리고는 순간적으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좋았던 기분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꽉 쥐어진 그의 주먹은 펴질 줄 몰랐다.

주먹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부들부들 떨렸다.

“로드리고...기다리고 있었어.”

에린이 조금 주저하지만 그래도 상냥한 목소리로 로드리고를 반긴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냐?

여긴 내 방이고, 낸시는 내 시녀다.

그런데 네놈은 마치 자기 방처럼 말하는구나.

건방진 자식...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로드리고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인다.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가증스러운 놈!

지금 여기서 있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겠다는 말이냐?!

나도 눈이 있다.

장님이 아니란 말이야!!!

로드리고의 입술에서 음습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크..크큭...크크큭....하..하하하...”

“로드리고?”

“도련님?”

로드리고가 에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리고 자기보다 키가 큰 에린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에린 공자님...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로드리고! 친구 사이에 존댓말은 쓸 필요 없다고...”

“그만! 이제 친구 놀이는 끝났습니다. 나가십시오. 더 이상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저히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친구라는 의미에 맞추어 줄 자신이 없군요. 저는 워낙 천한 놈이라 당신의 고상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에린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단호한 손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로드리고!”

“가십시오! 어서!”

에린은 한참동안 로드리고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에 뚜렷이 드러난 적개심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은 이대로 떠나자.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오해일 거야.

에린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로드리고의 방에서 그대로 쫓겨났다.

로드리고는 낸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로드리고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에 앉아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젠장...

당장이라도 낸시의 두 어깨를 붙잡고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싶다.

대체 뭐야?

에린 그 자식은 왜 여기 와 있었던 거냐고?!

그리고 낸시 계집애는 왜 그를 방으로 들인 거고!?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낸시가 얄미웠다.

뭔가 변명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에린 그 자식이 갑자기 덮쳐왔다던가...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면 뭐냐?

너도 좋았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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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산책은 어땠지?”

브라우닝 자작이 묻자 비욘느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냥...좋았어요. 주로...정원에 있었고...”

비욘느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자 자작은 말괄량이로만 알았던 딸애도 아직 어리지만 여자 아이는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다니 다행이구나. 너만 괜찮다면 로드리고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데 말이다. 어떠냐?”

“저..정말요?!”

“그래. 네가 직접 가서 그에게 물어봐 주겠느냐?”

“좋아요!”

비욘느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작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 참...만감이 교차하는 군.”

비욘느가 막 모퉁이를 돌아 로드리고의 방 근처까지 달려갔을 때, 누군가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소리쳤다.

“로드리고!”

하지만 그는 로드리고가 아니었다.

에린 공자였다.

또 무슨 일이람?

순간 슬쩍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로드리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래. 로드리고는 내가 보지 못하는 뭔가를 보고 있는 거겠지.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안녕하세요. 에린 공자.”

비욘느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에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차례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비욘느는 그의 무례한 행동에 그의 옷깃을 잡았다.

에린이 시선을 주자 비욘느가 말했다.

“제가 인사를 했잖아요?!”

“놓으시오. 지금은 레이디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오.”

“뭐라고요?!”

비욘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에린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놓으라고 하지 않았소?!”

그가 비욘느를 밀치자 그녀는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분한 마음이 치밀고 올라왔다.

지가 뭐라고 이러는 거야?!

나도 싫었지만 생각해서 말을 걸어주었더니 대체 얼마나 잘났다고 이러는 거냐고?!

비욘느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에린을 노려보자 에린도 이번에는 자기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비욘느에게 손을 내민다.

“일어나시오.”

하지만 비욘느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저를 바닥에 내치는 것도...그리고 다시 일으키는 것도 전부 공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요! 정만 거만하군요!!!”

“내가 거만하다고?!”

에린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래요! 당신은 정말 거만해요! 제가 이 세상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거만하다고요!”

“난...거만한 것이 아니오! 당신이 아무리 무례하게 대해도 나는 항상 깍듯이 예의를 지켰소! 그런 내게 감히 거만하다는 말을 지껄인단 말이오?”

“흥! 저는 로드리고를 좋아하지만 그가 당신을 두둔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순간 에린이 갑자기 비욘느의 두 어깨를 잡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나를 두둔했다고?”

“놔...놔요. 아프단 말이에요.”

“언제 그랬는데?! 말해봐! 어서!”

비욘느가 통증을 호소해도 에린은 그녀의 어깨를 놔주지 않았다.

“..조금 전에...산책할 때요.”

“그와 같이 있었어?”

“그래요! 이제 그만 놔요!”

비욘느가 그의 손을 쳐낸다.

하지만 에린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들려 줘. 응?”

“흥!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부탁이야.”

에린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욘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집을 꺾고 말했다.

“그럼...사과해요.”

“......”

“못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사과하지. 미안하오. 필요하다면 무릎이라도 꿇지. 원하시오?”

“돼..됐어요! 그런 것 까지는...그는 당신이 충분히 거만할 자격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고요. 자기가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하지만...에린 공자 당신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알아요?!”

“나..나와 비교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대체 왜?”

“당신이 거만하게 굴어서 그런 것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굴지 않았소!”

“에린 공자 당신은 나한테도 그렇게 말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무척이나 거만하단 말이에요. 당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어요.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사실이에요.”

“...그..그런...”

“아무튼 저는 로드리고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그만 가보겠어요.”

“레이디! 잠깐만!”

“싫어요! 저는 충분히 당신 부탁을 들어줬어요. 그렇지만 이 이상은 싫어요. 에린 공자 당신은 제 호감을 얻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늦어도 상관없소!”

“제가 상관있거든요?!”

그렇게 비욘느는 에린을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허공을 잡듯 손을 내밀어 보지만 더 이상 그녀를 잡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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