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로드리고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슬쩍 낸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듣지 못한 것처럼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라고 시키는 것도 싫었다.
아니,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싫었다.
결국 그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로드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긋 웃으며 비욘느가 서있다.
로드리고도 그녀를 좀 더 반겨주고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아가씨...”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비욘느라고 하라니까.”
“그럼 비욘느.”
빨리 그녀를 돌려보내고 싶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오늘 저녁 식사에 아버지께서 초대하셔서...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
“어디가 아픈 거야?”
비욘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냥 피로가 겹친 거겠죠. 자작님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응. 내가 잘 말씀 드릴 테니까 푹 쉬어. 의사라도 불러 줄까?”
“아니요.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 질 겁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실례지만 더 이상 용무가 없으시면 좀 쉬고 싶은데...”
“아! 그래. 알았어. 그만 갈 테니까 그럼...안녕.”
그렇게 비욘느는 방을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문 옆에 인기척도 없이 에린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죽여 비욘느가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에린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로드리고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소.”
“뭐라고요?”
“...기다리고 있다고 했소.”
“그게 뭐예요?”
“볼일을 마쳤으면 그만 가보시오.”
“에린 공자 지금 엄청 이상한 거 알고 있어요?”
“난 이상하지 않소. 그저 비욘느 양이 날 싫어해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아니요. 분명히 이상하거든요?”
“...이상하지 않소.”
비욘느는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입만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마디 중얼거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바보 아니야?”
“......”
에린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지만 딱히 그녀를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의 관심은 전적으로 방안에 있는 로드리고에게 향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잘못일까?
너의 언짢은 마음이 빨리 풀리기를 바랄 뿐이야.
혹시...정말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너와 나의 신분 때문에 내가 조금 거만하게 비춰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기분이 풀리면 내 어떤 행동이 너를 그렇게나 화나게 했는지 말해줘.
그럼 반드시 고칠 테니까....
그러니까...
낸시 양이라고 나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녀에게 로드리고에 대해 좀 더 물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아무튼 나는 여기서 네가 나올 때까지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릴 거야.
그래도 오랫동안 서있어서 다리는 아팠는지 결국 벽에 들을 기대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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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우닝 자작은 로드리고가 저녁 식사를 거절하자 대신 남작을 초대했다.
둘 사이에 좀 더 명확히 해두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조하는 액수에서부터 던전 개발 시 그 수익은 어떻게 나누어야 할 것인지 같은 문제들은 아무래도 당사자끼리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잘 오셨소. 남작.”
브라우닝 자작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로 부르셨소?”
남작의 까칠한 대답에 자작의 눈매가 살짝 떨린다.
하지만 금세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하하! 이거 왜 이러는 거요? 이미 로드리고를 통해서 서로 알아야 하는 것은 대충 알고 있을 텐데 말이요. 괜히 시간을 끌지는 맙시다.”
“흥! 그는 남작가의 대변인이 아니오. 그가 자작에게 뭐라고 했든 전부 잊으시오.”
자작도 더 이상은 웃는 낯을 유지하지 않았다.
자연히 목소리도 냉기가 스민다.
“크..크큭...이보게 남작,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나도 로드리고 군이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네. 그래서 이렇게 자네를 다시 부른 것이 아닌가? 지금 던전을 믿고 그렇게 기고만장해 있는 모양인데 어차피 남작가의 현재 상태로는 개발할 비용도 감당 못할 것이 뻔 할테지. 그러니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지 말게. 나는 두 가문이 모두 이번 일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던전은 남작가의 것이오.”
“그래서 내 원조 없이 혼자서 개발하겠다는 건가? 그러겠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곧 갚아야 할 채무가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과연 괜찮겠나? 던전 발굴을 위해 곡괭이질 한 번 하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영지 전체가 떨어질 텐데도?”
“다른 이에게 변통할 수 있소. 던전에 대해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채무자에게 말미도 얻고 더 많은 돈도 빌릴 수 있을 거요.”
자작은 한쪽 입 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정말 어린애 같은 발상이군. 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네. 바보와 손을 잡을 수는 없으니까.”
순간 남작이 식탁을 두 손으로 쾅 하고 내려쳤다.
그러나 자작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시오! 자작! 더 이상 내가 당신의 발이나 핥을 기세로 살랑거릴 거란 기대는 안하는 편이 좋아.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여러모로 다르니까 말이야.”
“크..크크큭...크크큭...상황이 다르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지. 내겐 던전이 있다.”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네.”
“뭐라고?!”
“이봐, 남작. 예의를 지키게나. 더 이상 그런 어투는 용납하지 않겠네.”
“용납하지 않으면?”
“자네는 지금 흥분해 있군. 그래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지. 그러나 뭐,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네. 원래 벼랑 끝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멋진 법이니까.”
“나는 더 이상 벼랑 끝에 서있는 것이 아니오”
“아니. 여전히 벼랑 끝이네. 던전이 실제로 있다고 치지.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피 던전은 하나의 기회일세. 일확천금의 재원이 들어올지도 몰라.”
“그래서 당신도 한 발 걸쳐보려는 것 아니오?”
“그렇지. 부인하지 않겠네. 그러나 남작, 그런 사람이 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런 자들을 물리칠 힘이 있소.”
“그렇겠지. 그러나 사람은 원래 돈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네. 자네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나? 자네가 가르치고 기른 기사들이 과연 평생 쥐어보지 못한 액수의 금화 앞에서도 자네에 대한 충성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나?”
“......”
“이제야 좀 이야기가 통할 것 같군.”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내겐 당신도 그런 위험들 중 하나일 뿐이오.”
“그래. 나도 그 말을 인정하겠네. 그래도 이미 나는 자네의 영지에 던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내가 자네의 원대한 계획에 한 발 디딘다고 해서 지금 현 시점에서 더 높은 위험을 불러 오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 않나? 내겐 넉넉한 자금이 있네. 하지만 자작가의 저력만으로는 뭔가 하기에 애매한 수준이란 말이야. 그리고 자네에겐 괜찮은 기사단이 있지. 뭐, 거지에 가깝지만...”
“자작!”
“흥분하지 말게. 내 말의 의미는 우리 둘 다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말하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자네의 아들이 로드리고 군의 친구라고 하던데, 맞나?”
“...뭐..그렇소.”
남작은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대륙 10강과 연을 맺고 싶다네. 그런데 그런 자들 중 하나의 제자인 로드리고 군의 친구를 난처하게 하는 건 내게 그다지 반길만한 행동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하고자 하는 말이 뭐요? 그래서 그 꼬마 녀석 때문에 내가 자작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하하! 그 꼬마가 자네의 아들을 이겼네. 그리고 자네도 이겼지. 자네의 기사단에 자네보다 더 뛰어난 실력자가 있나? 말해보게. 응?”
“...없소.”
“그렇다면 그는 자네 영지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한 것이겠군. 고작 꼬마에 불과한데도 말이야.”
“......”
“꼬마는 대단해 질 걸세. 차기 대륙 10강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지. 그가 끝까지 자기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어. 나는 그가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얼마를 바라시오?”
“4할을 주게.”
“...3할.”
“이보게 남작, 나는 최소한을 말한 걸세. 이 일에 대해 오랜 시간을 끌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좋소. 4할.”
“좋군. 그럼 축배를 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