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저녁이 되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낸시가 말을 걸어 왔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아니...말을 섞을 수가 없다.
그녀와 뭔가 대화를 하게 되는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고함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건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다.
낸시가 에린과 꽁냥꽁냥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가 만들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 테니까.
자존심상 차마 그럴 수는 없다.
“도련님?”
낸시가 다시 묻는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대체 뭐 때문에 삐진 거예요?”
삐진 거 아니다.
나는 그냥 잠시 기분이 좋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물어봐서는 안 되는 거다.
물론 마음속에서만 이렇게 중얼거린다.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식당에 내려가서 뭐라도 들어요. 아니면 가져다 달라고 말할까요?”
“됐어. 배고프지 않으니까 너나 먹어!”
“같이 가야죠.”
“...배 안 고프다고!”
“정말...그러지 말고. 자요. 예?”
낸시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나도 고집을 피우며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밀치고 말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려 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이내 손을 떼고는 말했다.
“너나 다녀와. 정말...배 안고파. 지금 먹으면 체할 것 같고.”
“어디 안 좋아요?”
“그래. 많이 안 좋아. 그러니까 그냥...가.”
“...알았어요.”
낸시가 방문을 나섰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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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공자님?”
낸시는 방문 옆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에린을 보고는 말했다.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낸시 양, 다행입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순간 낸시의 얼굴이 붉게 변한다.
“저..저를 기다리셨다고요?”
“그럼요. 로드리고가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혹시 아십니까?”
“아! 그..그것 때문에요?”
“그는 제 첫 친구입니다. 이대로 그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똑바로 낸시를 바라보는 에린의 시선에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낸시 양?”
에린이 다시 한 번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는 잠시 흠칫 하고는 말했다.
“모..몰라요. 도련님이 왜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낸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몸이 좋지 않다나 봐요. 저녁도 먹지 않겠다고 했고요.”
“몸이 좋지 않다구요? 이런...걱정입니다. 의사는 부른 겁니까?”
“아니요.”
“제가 당장이라도 의사를 불러와야겠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는걸요.”
“그래도...”
“그보다 저녁은 드셨나요?”
“아직 입니다.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럼 에린 공자님도 식사를 하셔야죠.”
“저도 입맛이 없습니다. 제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서 그를 기다리렵니다.”
비장하기까지 한 에린의 말에 낸시는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는 안 돼요.”
“하지만 로드리고도 굶고 있는데 저만 배를 채울 수는 없지요.”
“그런다고 누가 기뻐하겠어요? 도련님은 잠시 쉬고 싶으신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식사를 하세요. 예?”
“...레이디께서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거절할 수 없군요. 그럼 같이 가시죠.”
에린이 낸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낸시는 멈칫하며 목발을 짚고 한 걸음 물러섰다.
“레이디?”
에린이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낸시가 서둘러 말했다.
“제가...제가 아직 제대로 씻지 못해서...아마 저와 같이 걸으시면 불쾌하실 거예요. 그리고 다리도 온전치 못해서 오래 걸리고...”
“그런 건 낸시 양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겐 항상 좋은 냄새만 나니까요.”
“...그..그래도 손을 잡을 수는 없어요. 목발도 짚어야 하고...”
“그도 그렇군요. 그래도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낸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린은 그걸로 만족스러운지 싱긋 웃으며 그녀와 같이 걸었다.
물론, 느린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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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가 방을 나서고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그래. 따지고 보면 낸시는 내 마누라도 뭣도 아니야.
지금에 와서 내가 그녀에게 그때와 동일한 의무를 요구할 수는 없지.
너무 내 생각만 한 걸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우리가 결혼했던 것도, 그리고 우리 사이에 태어났던 아이들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분명 거기에는 존재했지만 여기에는 그렇지 않지.
나는 처음부터 뭐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이미 그때와는 너무도 다르게 모든 것들이 흘러가 버렸어.
그녀는 목발 따위는 짚지 않고 평생을 살았었는데...
하지만 내가 전부 바꾸어 버렸지.
어쩌면 에린에게 그녀가 호감을 보이게 된 것도 전부 내 탓일 거야.
내가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그녀와 나는 그때처럼 별일 없이 결혼하게 되었을 텐데...
물론, 비욘느 같은 건 내 인생에 없게 되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이미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했어.
그리고 이미 바뀌어 버린 것들을 다시 바로 잡을 수도 없어.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어.
이제는 이대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해.
하지만...아직은 늦지 않은 거겠지.
내가 비욘느와 낸시 둘을 모두 얻겠다는 것은 과한 욕심인 걸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과거에 당연히 내 것이었던 것과 과거에 항상 그리워하고 후회했던 것을 얻고 싶을 뿐이야.
이건...이건 조셉이 한 번의 인생으로 전부 얻었던 것에 불과하잖아?
그는 둘이 아니라 훨씬 많은 여자들을 거느렸어.
그런데 나는 단 둘도 거느리지 못한단 말이야?
그런게 어디 있어?
나는 이대로 물러서지 않아.
그래. 지금이라도 낸시를 따라가자.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까 다시 그녀의 마음을 내게로 돌리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그리고 어차피 여길 떠날 거잖아?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그럼 에린의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거야.
오랜 시간은 애틋한 마음도 옅어지게 하곤 하니까.
나중에는 얼굴도 희미해질 거야.
로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둘이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저기엔 내가 낄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로드리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왜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이 눈물의 의미는 쓰라림이다.
그리고 후회.
과거에 익히 느껴본 것이다.
그는 조용히 다시 문을 닫았다.
하지만 눈으로는 점점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을 끝까지 쫒는다.
떠나자.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짐을 꾸렸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루트였다.
그리고 모포와 돈을 챙긴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돈의 절만을 꺼내서 낸시의 짐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방에 비치되어 있는 종이에 글을 적었다.
낸시는 읽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물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편지를 읽어주는 이는 에린이 되겠지.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린다.
낸시에게
행복하길 빈다.
에린이 너를 잘 돌봐주길 빌게.
그는 믿을 수 있는 남자고 가문도 좋으니까 네가 큰 부담이 되진 않을 거야.
네 다리를 고쳐준다고 했는데...아무래도 이대로는 무리일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야.
내가 약을 구하든 훌륭한 마법사를 데려오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에린의 곁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 삶에서 내가 저지른 잘못을 이대로 방치하진 않을 거야.
너는 반드시 두 발로 서게 될 거야.
P.S. 에린, 부탁한다.
그렇게 로드리고는 성의 마굿간으로 가서 자신의 마차를 찾았다.
제대로 관리되어 있다.
오히려 처음 마차를 여관에서 가져왔을 때보다 훨씬 좋은 상태였다.
성을 빠져나오는 그를 제지하는 병사는 없었다.
일단은 정보길드로 가자.
거기에 의뢰해 놓은 것이 있으니까.
지금쯤이면 제대로 조사해 두었겠지.
그리고 엘가에게도 들려보고 말이야.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단지 주의를 돌릴 뭔가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