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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46화 (146/200)

00146  프레사를 떠나며  =========================================================================

마차를 타고 빈민가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길의 너비가 일정치가 못하다.

결국 로드리고는 근처 여관에 들러 마차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귀중품과 루트는 직접 챙겼다.

곳곳에서 술주정뱅이들이 욕설을 지껄이며 웃어 재꼈다.

시비가 붙어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 로드리고를 손짓으로 부르기도 했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다.

모두 무시하고 로드리고는 그냥 걸었다.

딱히 이곳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누구든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암울함이 공기 곳곳에 깔려 있는 것만 같다.

자연히 로드리고의 걸음이 빨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집은 불이 켜진 채였다.

로드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곧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엘가의 목소리다.

“저예요. 로드리고.”

문은 곧 열렸다.

엘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어디 갔었어?”

“예. 잠깐 일이 있어서요.”

로드리고는 안심했다.

우선 그녀가 건강해 보였고, 전처럼 불안정해 보이지도 않았다.

“들어올래? 마침 손님도 없고.”

“그럴까요?”

“응. 괜찮아.”

집은 전에 왔을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녀는 허름한 테이블로 로드리고를 안내했다.

“앉아. 뭔가 좋은 걸 내야 하는데 물밖에 없어. 미안해.”

“아니요. 물이면 충분해요.”

“그보다 무슨 일이야?”

“그게...이제 멀리 떠나야 해서요. 그래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갈까하고...”

엘가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쓸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짓는다.

로드리고는 그 미소에서 체념이란 감정을 엿본다.

조금 가슴이 아팠다.

“그렇구나. 다시 여기에 오진 않을 거야?”

“아니요. 올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떠나야 해요.”

“중요한 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떠나야 해요.”

“...응...중요한 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지. 그것이 어떤 일인지는 필요 없지.”

“저기..저 사과하고 싶었어요.”

“뭐가?”

엘가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날이요. 그냥 떠나버려서...아침에 인사라도 하고 갔어야 했는데...”

“아니야. 뭔가 일이 있었겠지.”

“......”

“......”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여기 있을 수가 없었을 뿐이에요.”

“이해해. 그러니까 일부러 찾아와서 사과할 필요는 없었어. 물론, 네가 찾아오는 건 환영이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싫어. 그냥 내 얼굴이 보고 싶어서라면 몰라도.”

그녀가 피식 웃는다.

로드리고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는 말했다.

“물론 엘가의 얼굴이 보고 싶었어요.”

“정말? 그거 기쁜데?”

“정말이에요.”

“좋다. 요 며칠 사이 들어본 말 중에 가장 기분 좋은 말인데?”

“그냥 한 말이 아니에요.”

“나도. 그냥 한 말이 아니야. 정말로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여기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는 말...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여긴 좀처럼 기쁜 일이 없으니까. 답답하고 숨 막혀. 떠날 수 있으면 언제라도 떠나야지. 나도 떠날 수 있다면 아마...떠났을 거야. 기쁜 일도 순식간에 우울함 속에 숨어 버려. 다시 기억해 내려 해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지. 그냥...그냥 그래. 이상한 말이지?”

“...이상하지 않아요.”

“......”

엘가도 로드리고도 한참동안 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일이요?”

“응. 일. 자랑은 아니지만 난 우울함에 익숙하니까. 그러니까 네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착각은 아니에요.”

“나한테 말해줄 수는 없고?”

“엘가가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요. 나중에...좀 더 시간이 지나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못하겠어요.”

“그래. 그럼 기다릴게. 나중에 돌아오면 들려줘.”

그녀는 로드리고를 재촉하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엘가는요?”

“나?”

“예. 그날 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엘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나도 지금은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네가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 해줄게. 서로에게 지금은 말하기 힘든 걸 그때에는 이야기해주자.”

로드리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엘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 손님이면 오늘은 거절할 테니까 편히 있어도 돼.”

그녀가 문을 열기 전에 묻는다.

“누구세요?”

“나야! 어서 문 열지 못해! 남의 서방 죽인 년아!”

적의가 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다.

그리고 의외로 여자였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한차례 쳐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을 열었다.

로드리고도 혹시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엘가의 뒤편에 가서 섰다.

여자는 낯이 익었다.

한스라는 사내의 아내였다.

기절한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을 때, 한번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겁에 질려 몸을 떨며 비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독기가 가득하고 기세등등하다.

무엇이 저 여자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한스가 죽어서?

“안나 언니...”

엘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안나라 불린 여자는 엘가의 앞으로 거칠게 손을 내밀 뿐이다.

“어서 내놔!”

엘가는 품을 뒤지더니 얼마간의 돈을 꺼내들었다.

안나는 달려들듯 그녀의 돈을 빼앗았다.

로드리고는 그 모습을 보고는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상대가 여자라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와 말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러운 년! 몸이나 파는 년아! 다음엔 좀 더 네년 가랑이를 벌려서 많이 내놓도록 해! 알아들어?! 너 때문에 우리 애들은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단 말이야! 알아?!”

그렇게 말하고는 안나가 엘가를 힘껏 밀었다.

로드리고는 뒤편에서 엘가를 부축하며 안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로드리고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차례 엘가와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흥! 저런 꼬마에게까지 가랑이를 벌리다니...정말 더러운 암캐라니까.”

로드리고는 그녀를 노려봤지만 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엘가는 로드리고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미안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서...나 때문에 로드리고까지 오해받아버렸어.”

로드리고는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대체 저 여자는 뭐에요?”

“그냥...힘든 거야. 한스 오빠가 죽어 버렸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한스가 죽은 건 마차에 치여서 였어요. 엘가 잘못이 아니라구요!”

처연한 표정으로 엘가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 하는 걸?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해.”

“그래서 그게 엘가라구요?”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나 혼자 먹고 살 만큼은 벌고 있고. 안나 언니까지 몸을 팔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아이들도 있어. 언니한테는 돈이 필요해. 원망할 누군가도 필요하고. 그리고 나한테는 그 두 가지가 전부 있는 걸.”

“보통 그런 게 있다고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요!”

엘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로드리고...나도 필요한 거야. 이 어두운 곳에서 내 손에 쥐고 있어야할 작은 빛이 말이야. 언니가 원망할진 몰라도 안나 언니도...그리고 그 아이들도 내가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걸. 여긴 그런 게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로드리고는 후회했다.

성을 이렇게 빨리 나와 버리는 것이 아니었어.

내 감정에 너무 취해서 엘가에게 성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걸 잊고 말다니...

그녀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입맛이 썼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로드리고는 결국 엘가에게 묻고 말았다.

“엘가...여기에서 떠나요. 저랑 같이 가요. 혼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제가 같이 가줄 테니까. 편한 여행은 아닐지 몰라도 이곳보다는 나을 거예요. 저는 엘가가 꿈꾸는 멋진 기사는 아니지만 지켜줄게요. 아무도 엘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할게요.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요.”

엘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원한다면 여기를 떠날 수 있을 거야. 우리 새로 시작하자. 응?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말이야.’

엘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리고...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하지만...나는 갈 수 없어. 내가 떠나면 안나 언니와 아이들은 죽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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