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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47화 (147/200)

00147  프레사를 떠나며  =========================================================================

로드리고는 순간 말을 잊고 말았다.

엘가는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녀 앞에서는 내 모든 고민과 슬픔이 힘을 잃고 말아.

로드리고는 엘가를 꼭 껴안았다.

자기보다 키가 컸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엘가도 그런 로드리고를 꼭 껴안아 주며 속삭였다.

“그래도...정말 고마워...”

로드리고는 그녀의 품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 고마워하지 마세요. 전 엘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예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당신이 싫어해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을 데려갈 거예요. 반드시..”

“그런 건 몰라. 나는 외로울 뿐이야. 그래서 안나 언니를 놔둘 수 없어.”

“그래요. 엘가는 외로움을 알아요. 그래서 따뜻해요. 하지만 지금껏 그 따스함으로 다른 사람을 덥혀주기만 했잖아요? 주기만 해서는 안돼요. 좋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행한 사람이 될 뿐이에요. 이제 당신 안의 따스함이 꺼져가는 게 느껴져요. 이유는 몰라요. 그냥 알아요. 저는 정말로 알 수 있어요. 눈으로 보는 것처럼...이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처럼 저는 그걸 알아요.”

“오늘 로드리고는 이상한 말을 하네?”

엘가는 습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여기는 이상한 곳이니까. 그래서 저도 이상하게 변해요. 엘가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요. 이제 떠나야 해요.”

“그래. 로드리고 말처럼 나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는지도 몰라. 떠나고 싶어. 나도 누군가에게 따스함을 받고 싶어. 나도 알아. 나는 꺼져가고 있어. 내 안에 온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 난 더 이상 네가 기억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야. 하지만 이제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내가 아는 건 하나야. 여기에서 내가 사라지면 다른 누군가가 내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거야. 아마 안나 언니나 아이들이 되겠지. 난 여기 오래 있어봐서 알아. 이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슬픈 일인지 말이야. 그래서 난 떠날 수 없는 거야. 이런 걸 경험하는 사람은 나로 족해.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열어주는 것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그래도 매일 같이 생각해. 내일은 좀 더 나을 거야. 그렇게 말이야. 물론, 나아지는 것은 없어.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을 계속해서 걷고 있어. 언제부터 그랬던 건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아. 그래도 아직까지는 계속 걸을 수 있어. 내가 꺼져가는 것을 아는 것처럼 내가 좀 더 버틸 것을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결국은 꺼지게 되어 있어요.”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야. 나보다 좀 더 밝은 곳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나도 거기에 가고 싶어. 하지만 너무 어두워. 나는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몰라. 하지만 걷고 있어. 오래 전부터 어딘가를 향해서 걷고 있어.”

“나에게 등불이 있어요. 지금 가지고 있어요. 엘가는 내 손을 잡고 따라오면 돼요. 안나가 걱정이라면 그녀에게 돈을 줄게요. 제가 가진 거의 전부를 줄 수 있어요. 아마 그녀에겐 큰돈이 될 거에요. 그걸 어떻게 쓰느냐는 그녀의 몫이에요. 저는 엘가가 이대로 차갑게 식어가는 걸 지켜보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게 제가 할 일이에요. 저는 알아요. 조금 전까지는 몰랐지만 이젠 알아요. 엘가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설명할 필요 없어. 나는 로드리고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 나 같은 것에게 이렇게나 상냥하게 대해주는 걸.”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정말로 다르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젠 그건 됐어요. 엘가 당신이 말했죠. 안나가 이제는 엘가의 삶의 의미가 되어 준다고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엘가가 저의 삶의 의미가 되어 줘요. 저도 어두운 길을 걷고 있어요. 전부 깜깜해요. 등불을 가졌지만...그건 제겐 소용이 없어요. 이건 다른 사람에게만 밝게 비춰주는 그런 등불이에요. 스스로의 길을 비춰줄 수는 없어요.”

“내가...너의 의미가 되어 달라고?”

“그래요. 당신은 충분히 했어요. 아니...이미 넘치도록 무리했어요. 이제 조금은 쉬어도 되요.”

“...그래도 될까?”

엘가의 목소리가 떨린다.

“돼요!”

“나는 무서워.”

“뭐가요?”

“다시 실망하는 것...누가 죽는 것...혼자 남는 것...전부 다 무서워. 내가 항상 겪는 그 모든 것들이 무서운 거야. 이러면 다시 기대하게 되고...다시 상처입지.”

“저는 죽지 않아요. 그리고 엘가도 죽지 않아요. 제가 지킬 거예요. 하지만 여기 있으면 엘가는 죽어요. 숨을 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 안의 아주 중요한 것이 모두 닳아 없어질 거예요. 혼자가 아니에요. 제가 함께할 테니까 겁먹지 말고 같이 걸어요.”

“......”

“엘가...”

“정말 괜찮을까?”

“괜찮고말고요.”

“...좋아. 그럼 하나만 약속해줘.”

“뭐든지요.”

“나보다 절대로 먼저 죽지 마.”

“......”

“약속해. 이제 혼자 남겨지는 건 절대로 싫어.”

“우린 죽지 않아요.”

“그래도 약속해.”

“엘가!”

“그날 밤 말이야.”

“예?”

“그날 밤...네가 한스를 데려온 그날 밤...릭이 죽었어. 나한테 오늘 네가 했던 것처럼 같이 떠나자고 했었는데...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했어. 나는 설레었어. 내가 오래 전에 버린 꿈의 편린을 붙잡은 것만 같았어. 이미 포기해 버린 꿈이 어느 날 내 눈앞에서 고개만 끄덕이면 이루어질 판이었어. 난 고개를 끄덕였어. 릭과 한평생 같이 사는 건 분명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그가 죽었어.”

“엘가...”

“누가 죽였는지 알아?”

로드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한스...그가 죽였어.”

로드리고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오는 걸 느꼈다.

“문을 두드려댔지. 나는 문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어. 하지만 릭은 고집을 피우며 문을 열었지. 한스에게 욕설을 퍼부었어. 그리고 날 안심시키려고 했지.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한스가 돌로 릭의 머리를 내리쳐 버렸어. 릭은 몸을 꿈틀 대다가 그대로 절명했어. 내 꿈은 그날 밤 그렇게 산산조각 나고 말았어. 그런데 네가 한스를 데려왔지. 이미 죽어버린 한스를 말이야.”

“엘가 미안해요. 저는 그럴 생각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녀가 그날 밤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엘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로드리고. 이건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녀는 로드리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나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뿐이야. 난 또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어. 그건 죽는 것보다 더 싫어. 한스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좀 더 좋았을 텐데...나는 그랬다면 그를 원망할 수 있었을 거야. 그건 지금의 안나처럼 누군가를 탓할 수 있는 거지. 그게 나를 버티게 해주는 또 하나의 힘이 되었겠지. 그러나 난 그렇게 운이 좋은 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어. 죽어 버린 사람에게 왜 죽었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으니까. 나는 그래서 안나가 얼마든 날 원망할 수 있게 해줬어.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그녀는 살아갈 수 있을까? 돈이 있어도 원망할 대상이 없어지는 걸...”

“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언제까지 허상만 쫓을 수는 없어요. 결국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게 될 걸요. 엘가...지금은 당신만 생각해요. 이제 충분하니까...당신은 충분히 했어요.”

“...후훗...그래도 약속해줘.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좋아요. 저는 엘가보다 더 오래 살 거예요. 당신이 죽는 순간에는 내가 곁에 있을 거예요. 손을 잡아주고, 이불을 덮어줄게요. 그래도 추우면 서로 이렇게 꼭 껴안아요. 그럼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춥지 않을 테니까요.”

“멋지다. 동화 속에서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청혼하는 것 같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잘 생기지 못한 걸요?”

로드리고는 에린과 낸시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엘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로드리고는 충분히 잘 생겼어. 부족한 건 나야. 공주처럼 순결하지도 않고...많이 배우지도 못했어.”

“아니요. 엘가도 충분해요. 제가 아는 그 어떤 여자보다 가장 공주님 같아요.”

“...거짓말...”

“어떻게 해야 믿을 거예요?”

“어떻게 해도 믿지 않을 거야.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걸.”

“아니요. 엘가는 자신에 대해서 잘 몰라요. 엘가의 안에 얼마나 훌륭한 것이 있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설레어 버린다구.”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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