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프레사를 떠나며 =========================================================================
어두웠다.
로드리고가 엘가의 집을 찾아올 때보다 어둠은 훨씬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로드리고도 엘가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불안함도 불쾌감도 지금은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든든함에 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비를 걸거나 엘가를 알아보고 추파를 던지는 사내들도 있었다.
하지만 듣지 못한 것처럼 둘은 계속해서 걸었다.
마침내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한스의 집이었다.
이제는 안나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로드리고가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서 1골드를 빼고는 엘가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넣어 둬.”
“하지만...”
“로드리고의 돈은 필요 없어. 내가 그동안 모은 돈만 해도 꽤 되니까.”
“전 엘가가 홀가분하게 떠났으면 좋겠어요. 여기에 뭔가 아쉬움이나 후회를 남기지 않고 말이에요.”
“응. 나도 그래.”
“정말 괜찮겠어요?”
“응.”
엘가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안나는 아니었다.
작은 꼬마 아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엘가를 올려다본다.
엘가는 몸을 굽혀서 꼬마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엄마는 어디 가셨어?”
“몰라요. 잠깐 나가신다고 했어요.”
엘가가 로드리고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엘가는 어떻게 하고 싶은 데요?”
“모르겠어. 언니를 만나고 가야 할 것 같지만...”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도 좋은 작별인사는 기대하기 힘들어요.”
“알고 있어.”
“저는 그냥 떠났으면 좋겠어요.”
로드리고가 엘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가는 잠시 주저하다가 로드리고에게 손에 들고 있던 돈주머니를 건넸다.
묵직했다.
이것이 엘가가 여기에 머물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는 증거구나.
로드리고는 엘가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 하나를 꺼냈다.
낡은 은화 하나였다.
그걸 다시 엘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가지고 있어요.”
엘가는 잠시 주저하다가 은화를 받아 들었다.
로드리고는 아이에게 돈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이걸 네 엄마가 오면 전해줘. 엘가가 주는 거라고 말해. 할 수 있겠어?”
“응!”
꼬마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로드리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주머니도 꼬마에게 건넸다.
꼬마는 그것도 받아 들었다.
“이건 네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어. 어딘가에 숨겨 놔. 그리고 정말 필요할 때 쓰는 거야. 알겠어?”
“나는 숨겨 놓는 것 좋아해.”
꼬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앞니가 하나 빠져있는 모습이다.
“그거 잘 됐네.”
로드리고도 꼬마를 보며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며 엘가에게 말했다.
“이제 가요.”
“돈...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처음부터 줄 생각이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
둘은 그 후로 곧장 로드리고가 마차를 맡겨 놓은 여관으로 향했다.
로드리고가 마차를 내오며 말했다.
“어둡지만 지금 떠나요. 내일이 되면 다시 망설여지게 마련이니까. 북쪽은 아직 성문을 닫지는 않았을 거예요.”
엘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마차 뒤편에 올랐다.
로드리고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 하고는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은 프레사를 떠났다.
성문을 통과하며 엘가는 소리 죽여 울었다.
그녀도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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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낸시는 에린과 함께 식사했다.
본래 그녀는 고용인들이 식사하는 곳에서 먹어야 했지만 에린이 고집을 피워 손님용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들게 되었다.
에린은 무척이나 품위 있는 몸짓으로 식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낸시는 감탄해야만 했다.
그녀가 어느 식기를 사용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에린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가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면 대개 소녀는 가슴이 설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내아이가 잘 생기고, 소녀보다 몇 살 더 많아 성숙해 보이기까지 한다면 말해 무엇 할까?
식사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올 때도 에린은 낸시와 함께였다.
낸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에린 공자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야.
하지만 도련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는 시골 계집애일 뿐인걸.
너무 설레지는 말자.
그리고 도련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곧 마을로 돌아가야 하잖아.
내일이면 안녕이야.
차라리 잘 되었어.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운걸.
이런 걸 헤나로 아가씨가 알게 되면 뭐라고 하실까?
낸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헤나로 아가씨를 본지도 오래되었네.
그리 대단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
헤나로 아가씨는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내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시겠지.
아마 헤나로 아가씨가 가장 관심을 가질 이야기는 에린 공자님 이야기일 테지만...
그래도 에린 공자님 이야기는 비밀로 하자.
아가씨는 좋아할지 몰라도 너무 창피해.
“제 걸음이 너무 빠른가요?”
에린의 목소리에 낸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느새 저 앞에 서있었다.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딴생각을 하느라...”
“어려워말고 빠르면 말해 주십시오. 걸음을 늦추는 건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정말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에린이 낸시를 향해 미소 짓자 낸시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화끈거려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방 앞에 도착하자 에린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들어가 보십시오. 레이디.”
하지만 낸시는 쉽사리 방문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혹시...제가 들어가도 여기서 계속 기다리실 건 아니죠?”
“아니요. 전 기다릴 겁니다. 로드리고가 방문을 나와 가장 처음 보는 사람이 저였으면 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언짢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몸은 괜찮아 졌는지도 궁금하고요.”
“그러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셔서 쉬세요. 이야기는 내일 해도 되니까.”
“아니요. 레이디의 이야기는 전부 들어드리고 싶지만 이것만은 제 고집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밤을 새실 수는 없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레이디는 어서 들어가서 쉬십시오.”
“정말...”
에린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두르고 낸시를 바라보았다.
낸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좋아요. 제가 들어가서 도련님께 말씀 드릴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에 에린이 활짝 웃으며 낸시의 두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레이디,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낸시는 차마 반짝반짝 빛나는 에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그래요. 여기서 에린 공자님이 밤을 나시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니까...따..딱히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하하! 그건 거짓말입니다. 저는 낸시 양의 다른 의미가 뻔히 보이는 걸요?”
순간 낸시는 더 이상 시뻘겋게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변해 버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순식간에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콩딱 콩딱 소리가 에린 공자의 귀에도 들릴 것만 같았다.
“뭐...뭐라고요?! 저...절대 아니에요! 그런 거...아닌데...저는 냄새도 나고...배우지도 못했고...또...다리도 이 모양이고...아무튼 절대로 에린 공자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오..오해예요. 오해!”
중언부언하는 낸시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에린은 잡고 있는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아 당겨 품에 꼭 안아버렸다.
“므..므아아아앗!!!!”
낸시는 당황해서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호리호리해 보이는 에린이 의외로 힘이 너무 세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낸시의 귓가에 에린은 조용히 속삭였다.
“낸시 양은 친절하게도 저와 로드리고가 다시 친구가 되길 바라는 겁니다. 저는 알 수 있어요. 말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당신의 친절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그래요! 바로 그거! 저..정확히 아셨네요...호..호..호...”
“하하하! 저는 이런 부분에서 꽤 날카로운 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낸시는 생각했다.
에린 공자님이 눈치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서글픈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