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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49화 (149/200)

00149  프레사를 떠나며  =========================================================================

“도련님?”

낸시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로드리고를 부른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낸시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디에도 그는 없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막 그녀가 밖으로 나가서 에린에게 로드리고의 부재를 알리려고 할 때였다.

침대 위에 올려 있는 메모가 눈에 띠었다.

도련님의 글씨였다.

낸시는 그걸 집어 들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글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간히 ‘낸시’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읽을 수 있다.

언젠가 도련님에게 배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보 아니야?

나보고 이걸 어떻게 읽으라고 메모를 남기는 거야?

밖에 에린 공자님께 읽어 달라고 할까?

하지만 낸시는 그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무식한 계집애라고 흉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싫었다.

뭐, 별 이야기 아니겠지.

잠시 외출하고 온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그녀는 침대 맡에 메모지를 올려두고 에린에게 로드리고의 부재를 알렸다.

“도련님이 잠시 나가셨나 봐요.”

“이런...”

에린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오늘은 이만 쉬세요. 내일 떠나기 전에 도련님을 만날 시간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낸시의 말에 에린의 표정이 굳는다.

“떠난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아! 도련님과 전 내일 마을로 돌아갈 거예요.”

“로드리고가 떠난다고?”

“예.”

“그럴 수가...”

에린은 실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일단은 쉬세요, 내일 아침엔 상쾌한 기분으로 도련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예?”

“...그렇지만...저녁을 먹는 것이 아니었소.”

에린이 고개를 흔들며 아쉬움을 표한다.

“그런 소리 마세요.”

“...아...미안하오. 낸시 양을 탓하는 건 아니었소.”

“...알아요.”

“내 알겠소.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하지만 로드리고가 돌아와 혹시 나를 찾거나 하면 언제든 나를 불러주시오. 자다가라도 달려올 테니까.”

“...알았어요. 쉬세요.”

“낸시 양도 쉬시오.”

그렇게 로드리고가 떠난 날밤엔 아무도 그가 떠난 줄을 모르고 지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낸시가 눈을 뜨고도 그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낸시는 서둘러 침대 맡에 놓아두었던 메모지를 찾았다.

손에 들고 다시 한 번 그걸 들여다보지만 역시나 의미를 알 길은 없다.

그때서야 낸시는 방 한켠에 놓아두었던 짐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짐이 부쩍 줄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발도 잊고 절뚝이며 방을 가로 질러 짐을 살폈다.

없다.

모포도 하나 없고, 도련님의 옷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지?

설마...아니겠지?

오늘 마을로 출발하리고 했으니까 도련님이 먼저 짐을 정리한 모양이야.

아마...그럴 거야.

분명해.

하지만 낸시는 미세하게 손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일단 메모지의 내용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뭐라 해도 에린 공자였다.

낸시가 막 방문을 열었을 때, 조금 추레한 모습의 에린을 발견했다.

“에린 공자님?!”

그녀가 놀라서 그를 부르자 그가 힘없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조금 전에 다시 왔을 뿐이오. 보시오. 옷도 갈아입지 않았소?”

하지만 낸시의 관심사는 지금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거요! 이것 좀 읽어 주세요!”

낸시는 무작정 어제 발견하고 방치해 두었던 메모를 에린에게 건네주었다.

에린은 엉겁결에 그걸 받아 들고는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도, 그리고 낸시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에린이었다.

“이런...멍청한!!! 이 메모를 방금 발견한 거요?!”

“아..아니오. 어젯밤에...하지만 별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저는...”

에린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발로 바닥을 굴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어젯밤에 발견했으면 곧바로 내용을 확인해 봤어야 하는 것 아니오?!”

평소에 보아온 모습과 확연히 다른 에린 공자의 모습에 낸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저는...”

하지만 에린은 낸시의 말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당신은 말하지 않았소?! 오늘 아침에 로드리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말이오! 하지만 이게 대체 뭐요?! 어젯밤에 메모를 읽어보지 않은 이유가 뭐요?!”

그의 추궁하는 듯한 말에 낸시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는...글을 몰라요.”

하지만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도 에린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글을 모르면 나에게 이 메모를 가져와서 읽어달라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정도는 기본적인 상식이오! 알고 있소?! 이 상황에서 당신이 글을 모른 다는 것은 절대로 당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실이란 말이오! 답답하군. 정말 답답해!!!”

에린은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들며 한숨을 쉬고 손으로 벽을 두드리고 바닥을 발로 굴렀다.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낸시는 입술을 깨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마침내 에린이 감정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일단 아버지와 자작님에게 말해야겠소.”

“아!...예.”

에린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낸시도 서둘러 그를 따라나서려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에린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대로 여기 있으시오. 당신은...느리니까. 딱히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아무쪼록 이해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걱정 마시오. 로드리고가 메모에 남겼듯이 나는 그의 친구로서 당신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소. 그러니...당신은 안전할 거요.”

낸시는 고집도 부리지 못하고 멍하니 멀어져 가는 에린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이유는 그녀도 몰랐다.

왜 이런 걸까?

전부 맞는 말인데 말이야.

에린 공자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너무 아파.

여기가...너무 아파.

그녀는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리고 절대로 닿지 않는 가슴 속 통증에 괴로워했다.

도련님은 왜 떠나신 걸까?

오늘은 분명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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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가 사라졌다.

메모 한 장과 그의 시녀를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에린은 머리가 어지러워 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시녀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단 말인가?!

고귀한 생각을 품은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저지르다니...

대체 글도 모르면서 메모를 보고 그대로 방치한 저의가 뭐란 말인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던 에린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까?

자작님에게로?

아니면 아버지에게로?

그의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아버지에게 가야 맞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로드리고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로드리고가 떠난 사실을 자작님에게 말하는 것도 막으려 할지 몰랐다.

그렇다면 그를 찾으려는 노력은 더욱 늦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작님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

에린은 내키지 않지만 로드리고와 비욘느를 이어주려는 노력까지도 보인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정해진 셈이다.

자작님에게로 가자.

나중에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어야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용의가 충분이 있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멈추었던 다리가 다시 바쁘게 움직인다.

이제는 거의 뛰는 것처럼 걸었다.

마주치는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에린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인다.

평소라면 일일이 반응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보지 못한 것처럼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건만 비욘느가 저 앞에 서있다.

그녀도 에린을 발견했는지 시선을 준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않았다.

그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에린을 불러 세웠다.

“에린 공자!”

“지금은 바쁘오!”

그가 그냥 지나쳐버리자 오기가 치밀었는지 레이디로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비욘느가 보였다.

그를 따라서 뛴 것이다.

“또! 또 거만한 짓이에요!!!”

무척이나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화가 난 목소리로 에린이 소리쳤다.

“젠장!!! 로드리고가 떠났단 말이오!!!!”

“헉...헉헉...뭐...뭐라고요?!”

하지만 더 이상 대꾸해주지 않고 에린은 더욱 발걸음을 빨리해서 걸어가 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비욘느는 멍청한 표정으로 멈추어 서서 중얼거렸다.

“거짓말...나한테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약속했으면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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