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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50화 (150/200)

00150  프레사를 떠나며  =========================================================================

“그 말이 사실인가?!”

브라우닝 자작이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에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건넸다.

“이런...갑자기 왜 떠난 거지? 혹시 남작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건 아닌겠지?”

자작이 에린을 노려보며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로드리고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시니까요. 그분의 관심은 오직 던전뿐입니다.”

자작은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오가며 인상을 쓰다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나?!”

곧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대기하고 있던 기사인 모양이다.

“제이미경을 불러오게! 그리고 마구간지기와 간밤에 성문 경비 책임자도 불러와! 서두르게!”

기사가 예를 취하고 사라지자 자작은 에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메모에는 낸시라는 소녀가 언급되어 있군.”

“로드리고의 시녀입니다.”

“흐음...그 소녀를 자네가 책임진단 말인가?”

“로드리고는 제 친구입니다. 그가 저에게 부탁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훌륭한 생각이네. 하지만 내용을 보니 다리가 불편한 모양이더군. 전에 내가 봤던 목발을 짚고 있던 소녀가 맞나?”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그 소녀는 내가 맡겠네.”

“예?!”

에린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이야기는 끝이네. 그만 물러가도록 하게나.”

“낸시 양은 제가 책임질 겁니다!”

에린이 자작을 노려보며 말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자네는 몸도 온전치 못한 소녀를 먼 남작가까지 데려가겠다는 말인가? 그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친구에 대한 도리인가? 응? 말해보게.”

“남작가는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낸시 양이 잠시 마차를 탄다고 몸이 축나지는 않을 겁니다! 제 친구에 대한 의무를 빼앗으려 하지 마십시오!”

“자네 흥분했군. 머리를 좀 식히고 오게나. 자네가 차분히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지금은 물러가게.”

“자작님!”

“물러가라 했네!”

에린은 그렇게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맛이 썼다.

너무 성급했던 건가?

자작에게 가서 로드리고가 떠난 사실을 말한 건 어리석었어.

아니다.

그 메모만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낸시 양을 보기 위해 로드리고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혹시 그를 찾지 못하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겠지.

그는 왜 떠난 것일까?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갈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욘느 양을 만나고 나서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에린은 다시 메모를 읽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제야 자작에게서 메모를 돌려받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시 가서 받아오고 싶었지만 아마도 자작은 메모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배제하려고 해.

로드리고에게서 남작가와의 인연을 끊고 싶은 것이겠지.

나는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어리석구나.

정말 어리석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로드리고를 찾기 위해서는 자작의 힘이 절실하니까.

언제까지 비밀로 해둘 수도 없었을 거야.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되질 않는다.

후회와 어쩔 수 없었다는 스스로를 향한 두둔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떠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 나는 기꺼이 같이 동행했을 텐데...

함께 하는 여행은 분명 즐거웠겠지.

많은 고민도 털어놓고, 더할 나위 없이 친해졌을 거야.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 버렸어.

그래도...메모를 남겼다.

쓸데없이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그가 남긴 메모에 이름이 언급된 것은 낸시 양과 나밖에 없으니까.

일단은 낸시 양에게 가보자.

내가 조금 전에는 너무 흥분해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나.

그녀에게 가서 사과하자.

그리고 자작이 뭔가 손을 쓰기 전에 아버지에게도 말해 낸시 양을 우리 가문에서 맡도록 해야겠어.

아버지가 나선다면 자작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 누군가 에린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린 공자!”

그가 돌아보자 비욘느였다.

화가 단단히 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비욘느 양에게도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말았군.

그는 조금 전 일이 떠올라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까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레이디.”

“그런 건 됐어요! 당신한테는 어차피 별로 기대도 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원래 무례한 사람이잖아요? 그보다 로드리고는 왜 떠난 거죠? 다시 돌아오나요?”

“모르겠습니다. 그는 메모를 남겼을 뿐입니다. 쓰여진 대로라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 같지만 그 시기를 알 길은 없습니다.”

비욘느는 손을 내밀었다.

“저한테도 보여줘요.”

“이제는 저한테 없습니다.”

“뭐라고요?!”

비욘느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린다.

“조금 전 일은 사과했으니 저에게 그런 어투는 삼가 주십시오.”

에린도 기분이 상하는지 비욘느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보다 그녀를 질책한다.

“하!? 이런 어투는 삼가 달라고요?”

“제대로 들으셨군요. 굳이 반복해서 확인할 필요는 없는 말인 것 같군요.”

비욘느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과만 하면 전부 끝이 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제 어투는 당신에게 적당한 어투니까 어서 메모나 보여 달란 말이에요!”

“저에게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튼 전 저를 함부로 대하는 분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에린이 걸음을 옮기자 비욘느가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가지 말아요!!!”

“이거 놓으시죠! 그리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 어투는 삼가달라고!”

에린이 차갑게 노려보자 비욘느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가..가지 말아주세요...에린 공자...”

조금 전처럼 높은 어투가 아니다.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에린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고는 말했다.

“메모는 자작님이 가져가 버렸소.”

“아버지가요?”

“그보다 나도 하나만 묻겠소. 어제 저녁에 로드리고의 행동 중에 뭔가 이상한 건 없었소?”

“이상한 거요?”

“비욘느 양이 성을 안내해 주면서 말이오.”

“아! 그때...”

비욘느는 순간 그가 검을 가르쳐 주던 걸 떠올렸다.

친절한 설명과 그의 칭찬.

그리고 비욘느의 손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로드리고의 손길...

하지만 그건 둘만의 비밀이다.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야.

게다가 에린 공자는 분명히 또 거만을 떨겠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평범했어요. 아주 평범.”

에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욘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그럼 저는 아버지에게 가봐야겠어요. 아..아무래도 그 메모...꼭 읽어보고 싶으니까...”

그녀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걸 보면서 에린은 그녀가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다.

아직 어린데도 저렇게 의뭉스럽다니 말이야.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건만 자기가 궁금한 것만 알고는 그대로 떠나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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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님, 부르셨습니까?”

“그렇네. 제이미 경. 로드리고 군이 떠났네.”

자작이 상심한 표정으로 말하자 제이미 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떠났다구요?”

“간밤에 갑자기 떠난 모양이네. 마구간지기를 통해서 확인했더니 자기 짐마차를 끌고 가버렸어. 성문 책임자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오가는 모든 자들을 살피는 건 아니니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지.”

“하지만 그는 어차피 떠날 사람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도 없이 떠난 것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저까지 불러 굳이 말씀하실 필요는...”

자작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제이미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보게! 왜 그러는 건가!? 답답하게! 대륙 10강 중 하나와 연이 있는 아이야. 그리고 그 아이도 지금 같은 상태라면 훗날 대륙 10강이 될 것이 분명하네. 그런 아이가 떠났는데 그냥 떠날 아이었다고 말하고 끝내란 말인가?!”

“아! 이런...저는 자작님이 거기까지 생각하실 줄은 미쳐 몰라서...그보다...세뇨르 선생이 뭔가 자작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이미 경이 슬쩍 자작의 눈치를 보며 말을 돌렸다.

“대체 왜 그러나?! 제이미 경! 지금 세뇨르 선생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아! 아닙니다. 그냥...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로드리고 군을 찾으러 갈 기사를 추천해주게.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말이야.”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예! 바로 한 녀석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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