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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53화 (153/200)

00153  프레사를 떠나며  =========================================================================

“낸시 양, 조금 전에는 제가 흥분해서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에린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서 사과했다.

낸시는 그의 행동에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니요. 제가 잘못한 걸요. 그렇게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당신이 용서해 준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고개를 들지 않겠습니다.”

“용서하고 말고도 할 것 없어요.”

“용서해 주실 때까지는 제 고개는 이대로입니다.”

“알았어요. 용서할 테니 어서요!”

그제야 에린은 자세를 바로 했다.

“낸시양, 갑작스럽겠지만 지금 당장 저와 제 아버지를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예?!”

말 그대로 갑작스런 말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낸시에게 에린이 설명했다.

“자작이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로드리고가 메모를 남긴 대로 제가 낸시 양을 보호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서 좀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니 어서.”

에린이 손을 내밀어 낸시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낸시는 급하게 자기 손을 빼내며 말했다.

“저를 보호한다구요?”

에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건 로드리고가 메모에 적어두지 않았습니까? 글을 모르신대도 제가 분명히 읽어드렸던 내용인데...혹시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기억해요. 분명히. 하지만 전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예?”

“전 로드리고 도련님을 찾으러 떠날 거예요. 이대로는 마을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낸시 양의 심정은 충분히 공감가지만 레이디는 분명히...”

에린이 슬쩍 낸시의 다리에 시선을 주며 말을 흐렸다.

“다리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목발이 있으니까. 조금 느릴 뿐이지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낸시 양 혼자서 어디 가서 로드리고를 찾는 단 말입니까? 목적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를 찾으러 성을 떠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고 낸시 양의 안전은 제가 로드리고에게 위임받은 사항입니다. 그가 부탁했으면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을 해주어야 합니다. 로드리고는 친구인 저를 믿고 이 일을 맡긴 것이니까요. 그것이 설령 낸시 양의 의사에 반대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저는 물러 설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에요. 저는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저 같은 병신 계집애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에린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런 말은 좋지 않군요. 아무래도 레이디가 사용할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낸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레이디가 아닌 걸요. 그냥 시골 출신의 계집애일 뿐이에요. 물론, 에린 공자님이 저를 상냥하게 대해 주시는 건 좋지만 그래도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제 말이 공자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해요.”

“딱히 낸시 양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스스로를 그렇게 비하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저는 친구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설령 그것이 낸시 양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낸시는 그런 에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에린 공자님은 잘생기고 멋있긴 하지만 정말 답답하구나.

너무 고지식하다고 할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아.

“낸시 양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강합니다. 우리 남작가는 그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잠시 동안 우리 영지로 가서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로드리고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겁니다. 게다가 낸시 양이 말한 대로 그를 찾아 혼자서 떠난다면 위험도 위험이지만 그와 길이 엇갈려 다시 만나는 시간이 훨씬 늦어지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남작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제 말에 따라주십시오.”

“저도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게 뭔지는 알 것 같아요. 하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걸요. 그리고...”

하지만 더 이상 낸시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에린은 낸시의 입술에 자기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므..므읏!!!”

낸시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뭐...뭐하는 거예요?!”

그러나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낸시와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에린이 말했다.

“더 이상 낸시 양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야기는 대충 상황이 정리된 후에 충분히 들을 수 있으니 지금은 우선 제 말을 따라 주십시오. 자! 제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죠.”

“하지만!”

다시 에린이 검지손가락을 세우자 낸시는 차마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낸시는 남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항상 예상했던 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설명을 전부 들은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에린이 소리쳤지만 남작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작에게 자금을 지원받게 되면 곧바로 던전 발굴에 박차를 가해야만 해. 그런데 그런 꼬마 녀석을 찾으러 인원을 차출하란 말이냐? 가뜩이나 모든 것이 부족해질 마당에?”

“하지만 던전에 대해 알려준 것은 로드리고입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준 것도 아니지 않느냐? 네놈은 지브릴 협곡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느냐?! 그 녀석은 찾고 싶은 자가 찾으라고 해라.”

에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작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낸시 양이라도 보호해 주십시오. 로드리고는 메모에 저를 언급하며 낸시 양의 신변을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영지로 돌아갈 때, 낸시 양도 같이 갈 수 있도록...”

“그만 해라!”

남작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에린을 쳐다보다가 슬쩍 낸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낸시는 남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남작은 손가락으로 낸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자작과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다. 자작이 저 년을 원한다고 했느냐? 저년을 보호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라. 오히려 이렇게 그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다면 싸다고 할 수 있지. 아무튼 그의 자금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로드리고는 저를 믿고!”

남작이 바닥을 발로 굴렀다.

쾅~!

“그런 멍청한 소리는 그만 하란 말이다! 친구? 지금 친구라고 했느냐? 그렇다면 네놈은 왜 그가 떠나는 걸 몰랐지? 그놈은 너를 조금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다! 알고 있느냐?! 고작 메모에 이름 몇 자 적혀 있다고 그런 걸 지켜줄 필요는 없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네놈의 어린애 장난에 어울려 달라고 고집을 부린단 말이냐?! 자작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자금 원조 사항이 이걸로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서 내 눈 앞에서 저 계집애를 치워라. 지금 당장 자작에게 데려다 주고 오란 말이다!”

“아버지! 낸시 양은...”

“그만! 그 ‘낸시 양’이란 말도 그만 둬! 네놈은 천한 년에게도 그런 호칭을 쓴단 말이냐?! 지금 네놈이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 알고 있느냐?! 응?! 시녀라면 나중에 귀빈이 왔을 때, 몸마저 내주어야 하는 위치다. 창녀나 다름 없단 말이다. 네놈은 창녀에게도 ‘레이디’라고 부르느냐? 더 이상 크레이머 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란 말이다!”

“......”

에린은 아버지의 말에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낸시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전적으로 자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욕을 당하라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낸시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다.

일단은 데리고 나가자.

더 이상 이곳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에린은 말없이 고개를 한 차례 푹 숙여 보이고는 낸시를 데리고 방을 빠져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에린이 말했다.

“미안하오.”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세요. 저는 딱히 상관없으니까.”

“전부 내 고집 때문이오. 낸시 양을 억지로 끌고 와서...”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

에린은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뭔가를 결심했는지 낸시의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낸시 양! 원한다면 자작님에게 데려다 주겠소.”

“예?! 아니요. 자작님이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제가 거길 왜...”

에린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혹시 조금 전 당신이 말한 대로 로드리고를 찾으러 갈 마음이 있다면 내가 함께 가겠소.”

“예? 예에에에?!”

낸시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소리쳤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여전히 낸시 양의 보호자로 남을 수 있소. 로드리고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게 된단 말이오. 어떻소?”

“그렇지만 에린 공자님은 영지로 돌아가셔야 하잖아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소. 낸시 양의 생각을 들려주시오. 좋소, 싫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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