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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54화 (154/200)

00154  방랑왕 호프레  =========================================================================

마차는 밤새 움직였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문제도 없이 용케도 달린 셈이다.

로드리고는 침침한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밤새 마차를 몰았을까?

얼마든지 마차를 길가에 세우고 잠을 청해도 되었을 텐데...

노숙이 싫었다면 지나쳐온 마을들에 들러도 되었다.

하룻밤 쯤 묵어가는 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로드리고는 어리고, 엘가는 젊은 처녀다.

집주인이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리는 없다.

그럼에도 로드리고는 마치 도망치듯 프레사에서부터 조금도 쉬지 않고 밤을 세서 달리지 않았던가?

‘엘가를 나쁜 기억이 가득한 프레사의 빈민가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 주기 위해서 나는 달린 거야.’

그렇게 로드리고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개운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 정도로 되었다.

이 문제를 굳이 지금 이 순간에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너무 졸리다.

엘가를 만나기 전에 내가 도시를 떠날 결심을 했던 것도 지금은 기억의 저편에 던져두자.

그녀를 그 암울한 곳에서 데리고 나온 일은 분명 잘한 일이야.

난 그 사실에 내 의미를 두겠어.

로드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 흔들리는 짐칸에 잠들어 있는 엘가를 쳐다보았다.

답답하던 마음, 부끄럽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다.

내겐 책임이 있다.

지금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

그거야 말로 형편없는 짓이 될 거야.

엘가에겐 내가 필요해.

순간 자작가에 시녀 자리가 하나 비게 된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서둘러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엘가는 내가 필요해.

단순히 먹고 살 수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야.

그보단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거야.

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

얼마 후 엘가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로드리고가 밤을 샌 것을 알고 걱정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둘은 길가에 서있는 나무 아래 공터에 마차를 세우고 불을 피웠다.

딱히 여기서 쪽잠을 잘 생각은 없었다.

다만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었을 뿐이다.

로드리고는 땔감을 주워왔고, 엘가는 식사 준비를 했다.

물과 밀을 넣고 끊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허기만은 달랠 수 있었다.

둘 다 아무 불만도 표하지 않고 묵묵히 먹었다.

엘가가 말했다.

“저기...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로드리고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든 것을 천천히 삼켰다.

아직 마땅히 정한 것이 없어서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

어차피 장소는 두 곳 중 하나다.

대륙 10강에게 찾아가봤자 문전 박대를 당할 뿐이다.

도피네 지방과 마르슈 지방.

가깝기는 도르네 지방이 더 가깝다.

게다가 회귀 전에 가본 적도 있다.

수도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해 있어 치안도 좋은 편이다.

여기서 짐마차로 간다면 한 달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마르슈 지방은 멀다.

가본 적도 없다.

왕국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치안도 나쁘다.

땅은 척박하고, 몬스터도 빈번하게 출몰한다고 들었다.

길도 정비가 되지 않은 곳이 많아 가는데 3달은 잡아야 한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도피네 지방으로 가야 했다.

혼자도 아니다.

엘가의 안전을 위해서도 도피네 지방이 적당하다.

그러나 그는 마르슈 지방으로 가고 싶었다.

이곳과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잠시라도 더 늦출 수 있다면 위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르슈 지방이요. 거기에 볼 일이 있거든요.”

“거기 북쪽 끝에 있는 지방이지?”

“예. 잘 아시네요.”

“응. 손님들한테 들은 적이 있어.”

“괜찮겠어요?”

“난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이젠 있을 곳도 없는걸. 그러니까 어디든 갈 수 있어.”

로드리고는 괜히 자기 때문에 더 먼 여행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꼈지만 더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그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엘가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릇에 담긴 것을 거의 다 먹어 치웠을 때였다.

저만치에서 한 사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로드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가까워지는 사내를 살폈다.

멀리서 사내도 로드리고를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보인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았다.

낯선 나그네는 아무래도 꺼려졌기 때문이다.

낸시가 그렇게 된 이후로는 자기도 모르게 경계하게 된다.

이런 로드리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내는 대략 마흔 정도로 보였다.

남루한 옷차림이었지만 눈빛에는 힘이 엿보였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런, 어린 아이와 여자 단 둘이서 여행이라니....”

딱히 비꼬는 어투는 아니다.

그저 걱정과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물론, 어린 아이라고 불린 로드리고는 기분이 상했다.

멀뚱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로드리고를 사내도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웃어주지 않았다.

엘가가 나서며 말했다.

“저기...식사 거리를 거의 다 먹어버려서...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만들 테니 드시겠어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고맙군요. 마을이 나오면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대접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하하하!”

“하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못 되요.”

“얻어먹는 입장에 뭘 가리겠습니까? 아리따운 아가씨가 만들어 주신다면 그걸로 족하지요.”

엘가는 사내의 칭찬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물과 밀을 넣고,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로드리고는 더 이상 사내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척하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러나 시선은 항상 사내의 주변을 맴돌았다.

사내도 자리에 앉으며 망토에 가려져 있던 검을 풀어 곁에 놓았는데 그것이 로드리고가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아가씨는 동생과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그게...마르슈 지방이요.”

엘가는 잠시 로드리고를 쳐다보고는 주저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사내가 동생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로드리고는 일일이 알지도 못하는 사내에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반박하지 않았다.

“마르슈라고요?!”

사내가 깜짝 놀라고 만다.

“...예...뭔가 잘 못 되었나요?”

“잘못되고 말고를 떠나 그런 곳에는 왜 가려는 겁니까?! 위험하단 말입니다. 연약한 여자와 어린 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근처에 가기도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고 말 테니까요.”

“하지만...로드리고가 거기서 볼 일이 있대요. 그러니까 가야 해요.”

“로드리고요?”

사내가 고개를 갸웃 거린다.

“그러니까...제...동생? 이요.”

엘가 스스로도 어딘지 어색한지 어투가 조금 이상했다.

사내의 시선은 당연히 로드리고를 향한다.

로드리고는 사내가 뭔가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신경 쓰지 말고 아침이나 때우고 가세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 꼬마 놈이!?”

“다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려는 겁니다.”

“나는 너를 걱정해 주는 거야.”

“오지랖이에요.”

사내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녀석이!”

사내는 꿈 밤을 먹이려는 지 로드리고의 이마에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젖히고는 피해버린다.

순간 사내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아무리 가벼운 손짓에 불과했지만 아무나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꼬마는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듯 여전히 띠껍게 쳐다볼 뿐이었다.

사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의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며 로드리고는 어딘지 불길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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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은 넓고 강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 정점에 선 자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대륙 10강이라 불렀다.

물론 대륙 10강에 들었다고 해서 가장 강한 10인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면 안 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은 갖추었겠지만 개중에는 다른 강자들에 비해 형편없는 무력을 가진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까지 굳이 대륙 10강의 자리에 앉힌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충분히 강했다.

과거를 돌아보면 엄청난 세력을 가진 이도 있었고, 측량키 어려운 재산을 모은 이도 있었다.

때에 따라선 치료 마법의 정점에 선 자들도 거론되곤 한다.

현 시점에도 치유왕 테레사와 법왕 라파엘은 이런 부류의 강자라고 해야 옳았다.

그럼에도 대체로는 일인의 무력에 그 선정기준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누가 뭐라 해도 용병왕 키슈갈이나 기사왕 알폰소, 마법왕 마나우스, 전쟁왕 듀크, 방랑왕 호프레, 불패왕 다르크, 사막왕 카심, 요정왕 발루아는 1인의 무력에 있어 그 정점을 찍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경천동지할 힘으로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자들.

하지만 그만큼 만나보기도 힘든 이들이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각자가 적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재능과 함께 뼈를 깎는 노력을 가능케 한 것이 복수심일지, 공명심일지 혹은 그 외의 다른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사연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로드리고라는 인물에 맞추어져 흐르고 있다.

따라서 로드리고와 여행길에서 만나게 된 방랑왕 호프레만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좀처럼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기 사내였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방랑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왜 그가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강한 자를 찾아다니며 겨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륙의 곳곳에서 모습을 보였다.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방랑만을 거듭하는 이가 어떻게 대륙 10강의 실력자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그는 방랑왕이라 불리기 전에도 대륙 10강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왕 호프레.

전대 기사왕이 바로 그였다.

제국 기사들의 정점에 선 자로 15년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떠나버렸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문은 무성했지만 어느 것 하나 오래 가지 않았다.

전부 시들해지더니 그저 방랑왕 흐프레라 불리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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