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5 방랑왕 호프레 =========================================================================
호프레는 경지에 들어 마흔쯤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올해 예순 한 살이다.
기사들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기사왕이라 불렸다.
지금은 알폰소라는 자가 그 타이틀을 가져가 버렸지만 그건 실력으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호프레 자신이 버렸을 따름이다.
개중에는 여전히 알폰소보다 호프레를 한 수 위의 실력자로 평하는 자들이 많았다.
앞날이 창창하기만 하던 호프레는 어느 날 생각했다.
내 검술을 이대로 사장시키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제자를 들여야겠어.
그러나 성급하게 아무나 가르칠 수도 없지.
혹시 제자가 극의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직접 내 검술의 완벽함을 증명할 수 있지만 내가 죽고 나면 내 검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제자의 몫이다.
제자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형편없는 검술이 되어가겠지.
세대를 거듭할수록 듬성듬성 중요한 것이 빠져갈 거야.
그건 좋지 않아.
후세에 나 호프레가 실제로는 별것 아닌 실력이었다고 말하는 꼴이지 않은가?
그날부터 호프레는 제자를 들이기 위해 고심했다.
그가 만일 제자를 구하고 있다고 말했더라면 충분히 많은 인재들이 몰려와 그에게 가르침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애초의 그의 목적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직에 있어가며 검만 수련했던 호프레도 깨닫는 것이 있었다.
세상은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사실.
결국 권력자가 막무가내로 자기 자식을 맡겨 버리면 좋든 싫든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형편없는 기사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말이다.
그자가 아무리 별 볼일 없어도 그는 기사왕 호프레의 제자로 불리게 된다.
그래서는 그의 목적과 상반된 결과가 나올 뿐이다.
처음엔 그를 동경하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매일같이 훈련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장난치듯 놈들의 뒤통수를 때렸는데 좀처럼 피하는 놈들이 없었다.
그런 간단한 시험조차도 통과하지 못하다니...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피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새로운 검술을 받아들이기에는 늦은 자들이었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자들이다.
아직도 수준은 미약하지만 그들도 나름 하나의 길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가르쳐 줘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에겐 호프레의 검술을 가르치기보단 커다란 맥락을 가르쳐 주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아무튼 결론은 그의 최소한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제자가 될만한 자를 찾았다.
물론 범위는 달라졌다.
보다 어린 녀석들로 바뀐 것이다.
그는 파티장에서도 끊임없이 시험했다.
나이가 어린 꼬마 놈들은 수준을 고려해서 꿀밤을 먹였다.
뒤통수를 때리는 걸 피할 놈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귀족들의 자식 놈들이라 그런지 살짝 때려도 엄살이 심했다.
감히 그에게 와서 항의하는 놈들은 없었지만 그에게 오는 초대장은 점점 줄어들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시험에 시험을 거듭했다.
나중에는 그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점점 제자를 구할 길은 요원해 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황제가 그를 불렀다.
황제가 말하길 어린 아이들을 때리는 행위를 그만 두라고 했다.
그가 그건 때리는 행위가 아니라 시험이라고 말했지만 황제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소리쳤다.
‘그냥 그만 하라고!!!’
결국 그는 더 이상 아이들을 시험할 수 없게 되었다.
기사는 섬기는 군주에게 충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는 들여야 했다.
고심 끝에 그는 기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이로써 더 이상 기사왕이란 타이틀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결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먼 훗날 자신의 검술이 여전히 최강의 검술 중 하나로 경원시 되는 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그를 말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누라도 자식 놈도 호프레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러났다.
물론 그는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의 검술을 온전히 익힐만한 재능을 보인자는 자기 아들놈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너무 혹독하게 가르친 것이 잘못이었을까?
마누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들놈이 10살 때 말했다.
‘저는 학자가 될래요!’
눈앞이 캄캄하게 바뀌었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며 놈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했지만 마누라의 치마폭 뒤에 숨어 버린 아들놈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래도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놈은 머리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절대로 학자는 될 수 없다.
몸으로 하는 것은 곧잘 따라 해도 뭔가 외우라고 하면 간단한 것도 못해서 쩔쩔 매곤 했으니까.
그러나 놈은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곧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놈은 점점 유식해져갔다.
마누라가 집에 들인 선생들이 말하길 머리는 조금 우둔할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집념이 있다며 아이를 칭찬했다.
그렇게 아들놈은 정말로 학자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꽤 이름이 알려진 학자가 되었다.
더 이상 아들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떠났고 방랑왕이 되었다.
그는 1년 안에 만족할만한 제자 놈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 그런 놈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마구잡이로 옮겨 다니며 제자를 구하는 짓은 3년을 기점으로 그만 두었다.
그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영지의 누구누구가 재능이 있는 모양이더라.
물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가보면 멱살을 붙잡고 뺨따귀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놈들도 많았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목적지를 정했다.
때로는 이름을 숨기고 정보길드에서 정보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성에 차는 녀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크레이머 남작가의 에린 크레이머라는 녀석이 꽤 재능이 있는 모양이라고 들어 확인 차 가보는 중이었다.
그는 많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 어렸을 때의 절반 정도의 재능이면 된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놈 같은 정도의 재능.
그런데도 이토록 찾기 힘들다니...
하지만 마침내 빛이 보였다.
점점 절망에 빠져드는 그의 눈앞에 나타난 이 녀석.
이 싸가지 없는 놈은 누구란 말인가?!
설마 우연히 피한 것은 아니겠지?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는 간단한 손짓으로 다시 한 번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이마를 가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드리고라는 저 꼬마 놈은 가볍게 피해버린다.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네놈 몇 살이냐?”
호프레가 물었다.
로드리고는 위아래로 호프레를 한차례 노려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도 하지 않고 엘가의 곁으로 가버렸다.
순간 호프레의 마음속에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
감히 방랑왕 호프레님이 묻는데 저따위로 쳐다보고 무시해 버린단 말이냐?!
울 때까지 두드려 패고 나서 제자를 삼아야겠어.
그래야 버릇이 제대로 들지.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머리에 아들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학자가 될래요!’
꿀꺽!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너무 심하게 대하면 결과가 이래저래 좋지 못하지.
뭐, 내가 호프레인걸 놈이 아는 것도 아니고, 이런 취급을 받아도 방랑왕 호프레가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과객A가 무시당한 것일 뿐이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아직 어린애가 세상의 혹독함을 모르니까 저러는 거야.
혹독함은 천천히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지.
일단은 내 검술의 대단함을 보여주어서 나를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지.
호프레가 화를 삭이며 ‘매는 나중에’를 가슴속에 새기는 동안 로드리고는 짐을 정리했다.
그가 막 로드리고에게 다시 말을 걸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엘가가 작은 그릇을 하나 내밀었다.
“드세요. 따뜻할 때 먹으면 먹을 만 해요.”
“아! 고맙소. 예쁜 아가씨.”
호프레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일단은 뜬금없이 일어나서 저 꼬마 놈에게 괜히 무안을 당하지 말고, 이 아기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편이 낫겠어.
지금 막 먹을 것도 건네받았으니 좀 대화를 나눈다고 이상할 것도 없고 말이야.
“이거 맛있군요.”
호프레가 엘가의 기분을 띄워주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훗’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맛은 없어요. 저도 조금 전에 이걸 먹은 걸요. 시장기를 가시게 할뿐이에요.”
“아니요. 정말 맛있군요. 아마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만들어 주어서 마법의 조미료가 들어간 모양이오.”
“호호호.”
엘가가 웃자 곁에서 짐정리를 마치던 로드리고가 호프레를 째려보았다.
호프레는 로드리고가 누나를 많이 아낀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여자가 좋아할 법한 말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로드리고가 말했다.
“엘가 그만 출발하죠.”
“하지만 밤새 마차를 몰았잖아. 조금 쉬고 가는 편이 좋지 않아?”
“조금 더 가면 마을이 있겠죠. 거기서 쉬면 되요. 여기 있다가 괜히 쓸데없는 사람하고 얽히면 골치 아프니까.”
쓸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로드리고는 노골적으로 호프레에게 시선을 주었다.
호프레는 이마에 살짝 핏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저 꼬꼬마 새끼가 정말!
하지만 호프레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저쪽에서 와봐서 아는데 마을이 꽤 멀리 있단다. 밤을 샜다면 여기서 좀 쉬고 가는 편이 좋아. 뭣하면 내가 보초라도 서줄 테니까. 이렇게 얻어먹은 대가라고 해도 좋고.”
“됐어요.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호프레는 이를 악물었다.
감히...감히....감히...방랑왕 호프레를 좀도둑 취급하다니!!!!!!!!
때려도 될까?
때리면 이 분노도 조금은 가라앉을 텐데...
아니야.
놈은 아직 내가 방랑왕 호프레인 거 모르니까...그러니까...
붉게 달아오른 호프레의 표정을 보며 엘가가 서둘러 말했다.
“로드리고, 호의를 보이시는 분에게 그렇게 말하면 못써. 어서 사과해.”
로드리고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보였지만 결국에는 호프레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무튼 지금 들고 있는 식기는 그냥 가지세요.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기도 귀찮고. 엘가 그만 출발해요. 여자가 이런 데서 노숙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호프레는 사과를 받았음에도 그다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엘가라는 네 누나는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대하면서 나는 이렇게 막 대하는 건데?
남녀 차별 하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