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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56화 (156/200)

00156  방랑왕 호프레  =========================================================================

“보아하니 네 누나를 몹시도 아끼는 모양인데 보호자 정도는 구해야지 않겠니? 내가 가봐서 아는데 마르슈 지방은 꽤 험한 곳이란다. 노련한 용병이 필요할 거야.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니까 말이다.”

꼬마가 싸가지는 없지만 그래도 누나는 아끼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겁을 주면 결국 용병을 구하려 하겠지.

하지만 남매 둘이서 하는 여행이다.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자금사정이야 뻔하다.

고민하는 저놈에게 내가 실력을 조금 보여주면 놈이 별 수 있으려고?

저맘때 사내놈들은 다 검술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식은 죽 먹기지.

뭘 보여줘야 ‘사부님, 사부님’하면서 따라다닐까?

그래도 처음부터 너무 대단한 걸 보여줘서 꼬마가 겁에 질리게 만들 수는 없지.

잘못하면 오줌을 지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음하하하하하하!

그냥 간단한 눈요기나 보여줘야겠군.

일 검에 나무 베기 정도면 적당할까?

호프레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뜬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필요 없어요.”

“뭐?!”

호프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요. 제가 꽤 강하니까. 마르슈 지방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죠.”

저 꼬마 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물론, 놈이 조금 재능이 있다는 건 나도 알겠어.

그렇지만 꼬마 수준에서 그럴 뿐이지 앞에 검을 든 산적 하나만 나타나도 벌벌 떨게 분명한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코흘리개 어린애들 싸움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모르는 걸까?

얻어맞고 코피 흘리고 끝나는 그런 장난이 아니라고!

자그마치 목숨이 걸렸단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네놈이 죽어 버리면 다시 전 세계를 이리저리 발품 팔며 돌아다녀야 해~!

나라고 방랑왕이 되고 싶어서 됐겠냐?!

젠장...집에 가고 싶어.

마누라도 보고 싶고.

하지만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대체 왜 나갔던 거냐고 물으면 뭐라 한단 말인가?

좋다.

방법이 없어.

이제 나도 벼랑 끝에 몰린 셈이다.

네놈이 그렇게 현실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내가 보여주마.

여기선 조금 엄하게 나갈 필요가 있어.

자칫 잘못하면 아들놈이 탈선해 버린 것처럼 이놈도 검술에 흥미를 잃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실패해 본 나다.

분명이 적당한 수준으로 꼬마를 압박할 수 있을 거야.

호프레는 어쨌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입 꼬리를 올리며 명백히 로드리고를 비웃는 어투로 말했다.

“그럼 어디 시험해 볼까?”

“뭘 시험해요?”

“네놈이 얼마나 강한지 말이다. 마르슈 지방에 가본 내가 직접 네놈이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인지 평가해 주겠다.”

“됐거든요.”

호프레의 이마에 핏줄이 팽팽하게 돋아난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저 아가씨에게 아침을 얻어먹었다. 자연히 저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네놈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정정해 줄 의무가 있는 거야!”

“엘가 누나도 괜찮다고 할걸요?”

호프레가 슬쩍 시선을 엘가에게로 향했다.

미미하게 엘가의 고개가 끄덕여 진다.

호프레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보지 못했다는 듯 그는 계속해서 격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건 모르는 거다!”

“그러니까 물어보자니까요. 방금 누나가 고개 끄덕이는 거 같았는데...”

“흥! 그렇게 겁먹어서야 어찌 네 아리따운 누나를 지킬 수 있단 말이냐?!”

“아! 진짜! 말 끊지 말고 좀 들어요!”

로드리고도 표정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자! 와라!”

호프레는 간단히 로드리고의 말을 무시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로드리고도 분이 뻗쳤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호프레 앞에 적당히 자세를 잡았다.

둘 다 맨손이었다.

호프레는 저런 꼬꼬마를 상대로 검을 뽑는다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로드리고는 저 사내가 짜증나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자연히 그런 상대에게 칼부림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호프레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선수를 양보하마. 꼬마야.”

로드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듣보잡 나그네가 분수도 모르고 저런 여유를 부린단 말인가?

이래봐도 나는 제이미 경도 이기고, 크레이머 남작도 이겼다.

이 근방에서 가장 실력자란 말이다!

로드리고는 한차례 호흡을 고르고는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상당한 빠르기였다.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던 호프레의 표정이 조금 기괴한 형태를 보이며 굳어 버렸다.

뭐야! 이게?!

이놈 왜 이리 빨라?!

아직 자기가 긴장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이가 없었다.

로드리고가 거침없이 주먹을 뻗어 오는 걸 살짝 고개를 젖히며 피했다.

그러나 곧바로 놈의 발차기가 이어진다.

무척이나 체계적인 몸놀림이다.

절대로 마구잡이로 내지르는 것이 아니다.

호프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벌써 스승이 있는 것이냐?!

그것도 꽤 제대로 가르친 것 같은데?

억울했다.

어떤 호로 새끼가 내가 탐내는 놈을 벌써 제자로 들였단 말이냐?!

지금까지 속에서 열불 뻗치는 것도 참으며 상대해 주었는데 벌써 더럽혀진 놈이었다니...

로드리고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발차기를 날린다.

정확히 호프레의 안면을 향하고 있다.

호프레는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을 들어 올려 검지와 중지를 모아 로드리고의 발길질을 막아냈다.

우둑!

기묘한 소리가 로드리고의 발목에서 울려 퍼졌다.

엄청난 통증이 로드리고의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로드리고는 바닥에 착지하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엘가 앞에서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호프레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로드리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뭐야?!

강하잖아?

로드리고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호프레가 이죽거렸다.

“형편없군. 정말 형편없어. 이래서는 마르슈 지방에 가기도 전에 죽어 버리고 말겠군.”

형편없다고?

내가?!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린과 낸시가 떠올랐다.

에린은 얼굴밖에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위해 왔다.

어느 모로 보나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결국 자신이 더 나은 것은 검술 실력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검술...어차피 황혼의 기사에게 벼락치기로 배운 것에 불과하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로드리고의 자존심이었다.

지금 검을 겨룬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몸싸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허접해 보이는 놈에게 내가 진다고?!

날 형편없다고 말했단 말이야?!

로드리고는 통증을 삭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며 발목의 상태를 살폈다.

탈골된 것 같았다.

평소라면 탈골된 시점에서 끝이었다.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낸시에게 부축하라고 성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낸시도 없고, 설령 있더라도 그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로드리고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발목이 다시 맞춰졌다.

눈앞이 캄캄하게 변할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

이마에 주르륵 하고 땀이 흘러 내렸다.

“로드리고!”

엘가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소리에 기겁해서 로드리고를 불렀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손을 들어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시선은 여전히 호프레에게 둔 상태로 입을 열었다.

“...내가 형편없다고?”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호프레의 말에 로드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도 없지. 이번에는 진짜로 간다!”

로드리고는 다시 호프레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호프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누구냐?

대체 누가 저 녀석을 길러 낸 거지?

어디 네 녀석의 실력을 전부 보여 봐라.

크크큭.

호프레의 입가에 시원스런 미소가 걸린다.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주먹질과 발차기.

꼬마의 체격에 비하면 상당히 묵직하다.

조금 전 스스로 탈골된 발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추는 모습도 마음에 든다.

그래. 그 정도 독기는 있어야지!

호프레는 피하기만 하다가 주먹을 내질렀다.

본래 실력에 비하면 별 볼일 없는 주먹질에 불과했지만 꼬마 녀석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정신없이 공격에만 치중한 상태에서 과연 놈은 어떻게 반응할까?

놀랍게도 꼬마는 허리를 있는 힘껏 비틀어 호프레의 공격을 피했다.

물론 그 후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을 정신없이 굴러야 했지만 말이다.

기어코 참지 못하고 엘가가 달려와 로드리고의 몸을 살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여전히 엘가의 손길을 밀어내며 호프레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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