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방랑왕 호프레 =========================================================================
호프레와 로드리고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호프레는 눈빛과는 다르게 입가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보석을 찾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방황해야 했던가?
이미 누군가에게 좀 배운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륙 10강에 그 이름도 빛나는 방랑왕 호프레의 명성은 헛것이 아니지.
내가 누군지 밝히는 순간 놈은 지금까지 배운 별 볼일 없는 스승을 버리고 나를 섬기게 될 테지.
무도를 추구하는 입장상 조금 마음에 찔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방랑하기는 싫다.
어차피 이정도로 재능 있는 녀석이라면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스승 놈이 앞으로는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할 거야.
금방 벽에 부딪혀서 이렇게 밖으로 주유시킬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충분히 놈에게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무도의 깊음을 보여줄 수 있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야.
결코 가로채기도 아니고.
나도 좋고, 저 싸가지 없는 꼬마 놈도 좋고, 그 이름 모를 스승 놈도 좋은 일이지.
물론 제자로 삼기 전에 심성은 좀 고쳐야겠지만 그런 거야 조금 더 밟아주면 되는 거니까.
호프레는 비웃듯 한쪽 입 꼬리를 과도하게 올렸다.
로드리고는 비틀거리며 땅을 짚고 일어났다.
곁에서 엘가라는 여자가 그런 로드리고를 말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둬!”
“이길 수 있어요! 저는 아직 최선을 다한 게 아니니까. 그냥 지켜봐요!”
“로드리고!”
“그냥 믿고 있어 봐요! 제발!”
로드리고는 다시 엘가를 밀쳐내고 호프레의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그런 로드리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엘가는 릭이 죽던 날 보았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도 저렇게 말했다.
말리는 내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고집을 부렸지.
그리고 어이없게 죽어버렸다.
엘가는 두려움과 공포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드리고가 오른쪽 주먹을 내질렀다.
호프레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로드리고의 반대편 내려치기를 호프만은 양손으로 잡고 비틀어 버렸다.
와드득~!
“끄으윽~!”
로드리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호프만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로드리고의 팔을 잡은 양 손 중 하나를 놓고는 그대로 팔꿈치로 턱을 가격해 버렸다.
어찌나 힘이 실려 있는지 로드리고는 그대로 공중에 떠서 저만치 내동댕이쳐졌다.
다시 일어서려고 버리적 거리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지 그대로 다시 바닥에 다시 쓰러지고 만다.
호프만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한 걸음으로 로드리고에게 다가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음을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절대로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이제 건방진 꼬마 놈을 어르며 나의 위대함을 설명해주면 끝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뜻대로 굴러가는 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일은 항상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곤 하니까.
엘가가 호프레와 로드리고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것이다.
“이제 그만 해요!!!”
엘가는 양 팔을 좌우로 넓게 벌리고 호프레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녀는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폭력은 무섭다.
아프다.
익숙하지만 그래도 좋아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녀는 이대로 로드리고가 저 사내에게 얻어 맞는 것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어이없게 죽게 만들기는 싫었다.
남겨지는 것은 싫어.
그러느니 차라리...
“엘가...”
로드리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음에도 시선만은 날카롭다.
어떻게든 일어서 보려고 하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이제 그만 해! 제발 그만 하란 말이야! 나보다...나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저는 죽지 않아요! 저런 놈은 어떻게든 이길 수 있으니까... 제가 증명할 거예요. 마르슈 지방에서 제가 엘가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할 거란 말이에요! 전 강하니까...그러니까 분명히...하악...하악...”
로드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충분히 증명했어! 그런 건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돼! 로드리고는 강해. 충분히 강하단 말이야! 나는 알고 있어! 더 이상 다치는 거 싫으니까 이젠 그만 해!!!”
“하악...헉...헉...이대로 그만 두면 전 진 게 된단 말이에요! 형편없다는 소리나 듣고...그렇게...”
“진거 아니야! 로드리고는 아직 어리잖아?! 저렇게 아침을 얻어먹고 어린애나 패는 사람은 상대할 것 없어!”
엘가가 소리쳤다.
“쿨럭!”
순간 굳건하기만 하던 호프레는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아니...아가씨...나는 그런 의도로 했던 게 아니라...”
당황스런 목소리로 호프레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호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일까?
겁에 질려 떨면서도 엘가는 꿋꿋하게 소리친다.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 같은 사람 이야기...듣고 싶지 않아! 가버려요! 가던 길을 가란 말이에요! 우리를 내버려 둬요!”
“......”
호프레는 뭔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입만 뻐끔거릴 뿐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질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는 정말 선량한 의도로 모두가 좋게 되는 방향을 생각했을 뿐이지만 세상일이란 게 좋은 의도로 시작했어도 끝도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나만 해도 아들놈을 성심성의껏 가르쳤지만 결국 놈은 나를 배신하고 학자가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저 아가씨가 보았을 때 나는 뜬금없이 나타나서 아침을 얻어먹고 동생을 두드려 패는 건달에 불과한 거야.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나는 어떻게든 저 꼬마 놈을 데려가야 해.
내가 목표로 했던 녀석이 여기 있는데 조금 실수했다고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실수는 바로잡으면 되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은 저렇게 흥분하고 겁에 질렸지만 생각해 보란 말이야.
친절하게 웃으며 아침을 건네던 저 아가씨의 미소는 정말 선량해 보였잖아?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충분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아가씨, 방금 전 일은 내가 사과하지.”
입가에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호프레가 말했다.
하지만 엘가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서며 로드리고를 일으켜주었다.
완벽한 무시였다.
그녀가 호프레에게 했던 행동과는 반대로 로드리고에게는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아...뭐 그럭저럭이요. 조금 발목이 뻐근하고 머리도 울리지만 조금 있으면 괜찮겠죠. 뭐.”
“괜찮지 않아!”
엘가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호프레를 향한다.
원망이 가득 담겨 있다.
그 시선을 받은 호프레는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도 나를 저렇게 걱정해주는 마누라가 있는데...
집에 가면 있는데...
“저기 나는...”
다시 한 번 허공중에 손을 뻗으며 알콩달콩한 분위기의 로드리고와 엘가 사이에 끼어 보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듣지 못한 것일까?
둘 모두 더 이상 호프레는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꾸도,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조금 더 크게 말해볼까?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면....
충분히 큰 목소리로, 모두 들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대꾸해 주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하지?
이상한 곳에서 소심한 호프레는 차마 다시 입을 열지 못하고 물끄러미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어린애들이 ‘이제 너랑은 안 놀아!’하고 따돌림 시키는 것과 닮은 장면이었다.
“저기서 좀 쉬어. 바로 출발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저기...”
로드리고가 그제야 다시 호프레에게 시선을 주었다.
호프레의 우울했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일말의 기대감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엘가는 곁에 있는 주먹만 한 돌맹이를 하나 집어 들더니 슬쩍 호프레를 노려본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 테니까.”
“......”
“......”
엘가의 말에는 로드리고도 호프레도 말을 잃었다.
하지만 엘가는 할 수 있다는, 혹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돌을 꽉 움켜쥐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호프레는 더 이상 이대로 방치된 존재가 될 수는 없어서 말했다.
“아가씨, 잠깐 이야기 좀...”
“뭔데요?!”
날카로운 목소리.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남자가 가진 무력과는 별개로 항상 남자를 주눅 들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호프레도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내는 아니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가 사과도 했는데...”
“뭐요?!”
“아니...그러니까 사과도 했고, 난 위험한 곳에 간다는 말을 듣고 어디까지나 도와줄 심산으로...”
더 이상 엘가가 듣지 않고 돌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오..옴마야!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호프레는 그렇게 주변을 기웃거리며 둘을 살폈다.
하지만 일정 거리 안으로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엘가를 자극해서 돌맹이를 던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얻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돌을 던지도록 내버려두면 자신의 가치가 한없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