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 남겨진 아이들 =========================================================================
자작의 집무실로 기사 하나가 들어선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브라우닝 자작이 물었다.
“그래. 찾았나?”
하지만 기사는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직입니다. 근방의 모든 마을로 기병을 파견했지만 어린 아이 혼자서 마차를 끄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조금 더 먼 마을까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좋은 소식 기대하지.”
기사는 자작에게 예를 갖추고는 물러났다.
그 모습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비욘느가 말했다.
“대체 저는 언제 출발하는 거예요?”
“기다려라. 무조건 급하게 출발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로드리고가 간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우를 범할 수 있어.”
“그래도 너무 늦어지잖아요? 이러다 영영 따라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 다구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비욘느가 바닥을 톡톡 찬다.
그 모습에 자작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하지만 굳이 비욘느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 말고도 할 일이 넘친다.
이런 일은 세뇨르 선생에게 맡겼다.
그가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바뀌지 않는데...
세뇨르 선생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하고 싶지만 자신도, 그리고 아들도 그가 가르쳤다.
그의 엄격한 가르침은 싫든 좋든 지금의 브라우닝 자작이 어디에서건 예절에 있어서 무지함을 드러내 본 적이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아도 세뇨르 선생의 잘못이 아니다.
한숨을 내쉬며 크레이머 영지를 지원하며 딸려 보낼 병력을 어떻게 배치할지 고심하던 차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작은 고개를 들어 누군지를 확인했다.
다급한 표정의 평기사다.
또 무슨 일일까?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평기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보고드립니다! 손님방에 머물던 낸시라는 소녀가 사라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자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뭐라고?!”
흔치않은 자작의 고함소리에 기사는 사색이 되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낸시라는 소녀가 보이지 않습니다...”
“짐은?!”
“예?”
“짐은 어떻게 되었나?!”
“그..그게 사..사라졌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자작은 책상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기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떨었다.
“당장 성문을 봉쇄하게. 그리고 부단장에게 알려 반드시 해결하라고 해!”
“예!”
기사는 서둘러 뛰어 나갔다.
곁에서 이야기를 들은 비욘느가 말했다.
“로드리고를 찾으러 간 거예요!”
“알고 있어!”
자작은 꽤나 흥분했는지 딸에게도 고함을 질렀다.
비욘느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기분이 상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숱하게 혼나본 경험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슬쩍 눈치를 보더니 괜찮을 것 같자 다시 입을 연다.
“낸시는 로드리고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거 아닐까요?”
자작은 허공에 손을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말했다.
“제발 조용히 좀 있거라. 아무튼 지금은 그 시녀를 찾아야 해.”
“저도 찾으러 가볼까요?”
자작은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래. 일단은 어디로든 가 있거라. 여기 있지만 말고.”
“......”
비욘느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살짝 입술을 삐죽이며 방을 나갔다.
어디로 갔을까?
다리도 불편한데 말이야.
그녀는 로드리고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일단은 어서 찾아보자.
뭣보다 직접 물어보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으니까.
혼자서 아무리 궁금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잖아?
그녀는 낸시의 방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미 사라졌다면 거기 가볼 필요는 없다.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 된 것도 아니다.
그런 곳에서부터 시작했다간 정말로 뒤만 쫓게 되겠지.
낸시는 다리가 불편하니까 걸어서 멀리 가지는 못해.
그리고 말을 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일단 마구간에 가보자.
마차도 같이 보관하는 곳으로 말이야.
비욘느는 우선 치맛단을 거리낌 없이 뜯어냈다.
그리고 브라우닝 자작이나 세뇨르 선생이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모습으로 복도를 있는 힘껏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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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은 짚이 가득 실려 있는 짐마차 속에 낸시와 짐을 숨겼다.
급하게 나오느라 본인의 짐은 챙기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낸시는 원래 로드리고와 함께 떠날 예정이어서 짐을 싸놓은 상태였다.
처음으로 마부석에 앉아 말을 출발시켰다.
어색한 손놀림이었지만 말은 까다롭게 굴지 않고 에린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가 막 마구간 입구를 지나가려는 순간 예기치 못한 사람이 마차를 막아섰다.
“에린 공자!”
비욘느는 절대로 레이디라고 할 수 없는 옷차림과 흐트러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린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어렵게 되려는 모양이군.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로드리고는 내게 낸시 양을 맡겼어.
그는 나를 믿고 있다.
자작이 마음대로 그의 신뢰를 빼앗아 가도록 할 수는 없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가장했다.
“무슨 일이오? 레이디 비욘느?”
“글쎄요? 그건 에린 공자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비욘느는 어찌나 뛰어 왔는지 계속해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모를 소리를 하는 군요. 내가 레이디께서 무슨 용무로 여기 왔는지 어찌 안단 말이오? 그보다 바쁘니 이만 비켜 주었으면 좋겠소.”
“좋아요. 바쁘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저도 마침 나가야 하는 참이니까 짐을 싣는 곳에 태워주시겠어요?”
에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말했다.
“어찌 레이디를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실 수 있겠소? 저는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없소.”
비욘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에린 공자는 원래 무례한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조금도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못해요.”
“아무튼 나는 그럴 수 없소.”
“그래요? 그럼 좋아요. 어쩔 수 없죠.”
마침내 비욘느가 길을 비켜줄 것 같자 에린의 표정에 안도감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디?”
“에린 공자는 뭘 하시는 건가요? 허름한 옷을 입고, 마부석에 앉아 짚이 가득 실린 마차를 몰다니... 무슨 일일 까나?”
“......비키시오.”
에린의 눈빛이 변했다.
하지만 비욘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낸시! 거기 있는 거 아니까 어서 나와!”
순간 에린은 이미 모든 것을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마차를 출발시켜야 할까?
비욘느 양도 결국엔 마차를 피할 거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가 막 고삐로 신호를 주려는 때였다.
부스럭거리며 낸시가 짚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에린은 차마 고삐를 흔들지 못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딘지 체념의 빛이 돈다.
비욘느는 낸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드리고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하지만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어요. 도련님을 찾으러 가야 해요. 저 혼자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주인님과 마님을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어요.”
비욘느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대했던 낸시도 로드리고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른다.
그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에린이 말했다.
“레이디 비욘느! 우리를 그냥 보내 주시오!”
비욘느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이미 성문은 전부 봉쇄됐을 걸요. 낸시가 사라진 걸 아버지도 아니까.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럴 수가!”
에린이 실망한 목소리로 탄식하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런 모습은 아무래도 에린을 싫어하는 비욘느조차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결국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아무튼 이젠 돌아가요. 제가 낸시를 찾았다고 하면 큰일은 없을 거예요. 에린 공자가 빼돌리려고 했다는 건 비밀로 해줄 테니까.”
“말조심 하시오! 정작 잘못을 저지른 건 자작님이지 내가 아니오!”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도리어 화를 내는 에린의 반응에 비욘느는 어이가 없었다.
“뭐라구요?! 지금 우리 아버지를 탓하는 거예요?!”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오!”
“정말 당신은 바보 멍청이에요! 조금도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니까!”
“나는 생각해달라고 한 적 없소!”
“으........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