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9 남겨진 아이들 =========================================================================
비욘느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무례하고 얄미울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이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어.
이참에 확실히 혼을 내줘야 한단 말이야.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면 어디 어떻게 되는지 보자 이거야!
우리 아버지 앞에서 한번 당해보라지!
하지만 그녀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누군가의 등장으로 상황이 순식간에 돌변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아가씨~!”
세뇨르 선생의 목소리였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고함소리에 가까웠다.
아마도 선머슴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복도를 뛰는 걸 본 모양이었다.
‘혼내려고 따라온 거야!’
비욘느는 서둘러 모습을 숨길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짚이 가득 실려 있는 짐마차였다.
비욘느는 입술을 깨물더니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의 어이없는 행동에 에린은 당황했다.
하지만 적어도 비욘느가 지금 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들키기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그는 낸시에게 어서 숨으라고 손짓했다.
다행히 그녀도 이내 알아듣고 비욘느처럼 짚 속에 몸을 숨겼다.
곧이어 숨을 몰아쉬는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에린을 보더니 물었다.
“자네 혹시 비욘느 아가씨를 여기서 보지 못했나?”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말을 타고 시내로 가시는 걸 보았습니다.”
“뭐...뭐라고~~~! 그 모습을 해가지고 시내로 나갔다고?! 오! 맙소사~!”
하늘이 무너진다면 이런 표정을 짓게 될까?
세뇨르 선생은 보기에도 무참한 모습으로 주저앉을 것처럼 비틀거렸다.
서둘러 에린은 마부석에서 내려 그를 부축했다.
“어서 아가씨를 말려야 해! 그런 모습으로 시내를 활개치고 다니게 할 수는 없단 말일세!”
에린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제가 마침 시내로 나갈 일이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태워드리겠습니다. 비록 마부석 옆에 타셔야겠지만...”
“좋네. 어디든 어떤가? 지금 중요한 건 마부석이든 짐칸이든 그런 것이 아니야! 어서 출발함세!”
세뇨르 선생은 그렇게 에린과 함께 마부석에 앉게 되었다.
한편 짚 속에서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비욘느는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에린 공자 대체 뭘 하는 거야?! 왜 세뇨르 선생을 태우냔 말이야?!
나를 골려주려고?
정말 못됐다니까!
나가기만 해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세뇨르 선생이 멀어지기 전까지는 다짐을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급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뇨르 선생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이럴 수가...틀림없이 아가씨 때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이걸 어쩐단 말인가?”
“저기 성문 쪽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군요. 저기로 가볼까요?”
에린은 은근슬쩍 자기가 가야 하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물었다.
세뇨르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세.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평민 계집애도 하지 않을 모습을 저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시다니...이제 끝장이야. 하지만 더 이상 아가씨가 구경거리가 되게 놔둘 수는 없네.”
에린은 마차를 몰아 사람들이 가득 몰려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몰려 있어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게 답답했던지 세뇨르 선생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비키지 못해?!”
순식간에 사람들이 움찔하면서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내린 다는 것은 꽤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였으니까.
주변에서 통제를 하고 있던 기사 하나가 뛰어왔다.
그는 세뇨르 선생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세뇨르 선생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아가씨는 어디 계시나?”
“예?”
기사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말일세!”
답답하다는 듯 세뇨르 선생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가씨는 성에 계시겠지요.”
당연하다는 듯 기사는 대답했다.
순간 세뇨르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가씨께서 여기 계신 것이 아닌가?”
“예. 아가씨는 뵙지 못했습니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몰려 있는 거야?!”
세뇨르 선생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이건 영주님이 성문을 봉쇄하라고 지시하셔서...”
“영주님이?”
“그렇습니다. 손님으로 왔던 소녀 하나가 사라진 모양이라서...그보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세뇨르 선생은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아무 일도 없네. 아무 일도. 어서 일 보게나. 험...험험!”
그때, 에린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는지 대화 중에 끼어들었다.
“기사님! 혹시 봉쇄가 언제 풀리는 지 알 수 있습니까?”
그제야 마부에게 시선을 주며 기사가 말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그 소녀가 발견되지 않는 한 저녁까지 이어질지도 모르지.”
“하아...감사합니다.”
에린은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보고 세뇨르 선생은 조금 안된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느냐?”
“아!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하지만 세뇨르 선생은 신경이 쓰였다.
급한대로 여기까지 잡아타고 왔는데 이제 됐으니까 그대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뭐라 해도 세뇨르 선생은 예법선생이다.
세뇨르 선생이 곁에 서있는 기사에게 나직이 묻는다.
“이보게, 어떻게 사정을 봐줄 수 없겠나?”
하지만 기사도 난처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명령인지라...제가 어떻게 하기에는 좀...”
“그렇겠지.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네. 듣지 못한 걸로 하세나.”
충분히 공감한다는 투로 세뇨르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에는 역시나 난처함이 뚜렷이 떠오른다.
기사는 상대방이 우격다짐으로 명령을 내리면 같이 고집이라도 부릴 텐데 또 나이 지긋한 노인이 이렇게 나오자 뭔가 못할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고민하던 기사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좋습니다. 존경하는 세뇨르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모른 척 하겠습니까?”
“고맙네. 덕분에 내 체면이 서는군.”
“아닙니다. 너는 이리 따라오너라.”
에린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며 세뇨르 선생에게 인사를 했다.
세뇨르 선생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에린은 봉쇄된 성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비욘느는 답답함 속에서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세뇨르 선생에게 이렇게 헝클어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게 에린과 낸시, 그리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비욘느까지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한참 뒤 겨우 짚 속에서 고개를 든 비욘느 눈에 들어온 것은 멀어진 성벽이었다.
“어쩌자고 이런 거야?!”
비욘느는 더 이상 존대도 해주지 않고 물었다.
“어쩔 수 없었소.”
“뭐가 어쩔 수 없어?! 성 밖이잖아?! 어서 돌아가!”
“싫소.”
“뭐라고?!”
“어차피 비욘느 양도 로드리고를 찾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데려가 줄 테니 그냥 있으시오.”
“그러기는 했지만...그렇지만 이렇게는 아니야! 게다가...짐마차잖아?! 돈도 없고! 호위도 없고...말도 안하고 나왔는데...”
“맞아요. 아가씨를 데리고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낸시도 걱정이 되는지 짚 속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말했다.
물론, 에린도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소.”
에린의 목소리에도 한숨이 섞여 나온다.
“나는 몰라! 다 너 때문에!”
“나 때문이 아니오! 내가 비켜달라고 했을 때, 비켰으면 이런 일도 없었소. 게다가 나는 당신보고 마차에 숨으라고 말한 적도 없소만?”
“그건 그렇지만...”
“....하아...좋소. 원한다면 여행 중에 검술을 가르쳐 줄 수도 있소. 물론, 내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하지만 비욘느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누가 너 따위한테 배우냐?!”
비욘느의 말에 에린은 마차를 몰다 말고 고개를 돌려서 소리쳤다.
“뭐라고?! 정말 말이 심하군!”
“심하긴 뭐가 심해?! 내가 아는 검을 쓰는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약하거든!? 알아?!”
차마 반박하기 힘든 말에 에린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우물쭈물하던 그가 겨우 다시 입을 연다.
“자꾸 반말 하지 마시오!”
“왜?! 하면 어쩔 건데?!”
“크흐윽...그만 합시다. 그만!!!”
둘의 모습을 곁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낸시는 생각했다.
남자는 다 똑같나봐.
에린 공자의 이런 모습은....도련님과 다를 바가 없는 걸.
왕자님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