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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60화 (160/200)

00160  남겨진 아이들  =========================================================================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럼 다음 마을에서 내려줄테니 알아서 프레사로 돌아가시오.”

에린도 화가 단단히 났는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멍하니 주변 풍경을 바라보던 비욘느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비욘느는 에린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이대로 여행한다는 건 말도 안 돼.

아버지께서 엄청 걱정하실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모습으로 로드리고를 만나고 싶지는 않은걸.

그녀는 스스로의 옷차림을 살폈다.

치마는 넝마가 된지 오래다.

잡아 뜯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머리도 산발이다.

다시 묶어 보고 싶지만 머리 손질을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난감하다.

게다가 머리칼과 옷깃 사이에 짚이 잔뜩 붙어서 조금 전부터 아무리 손으로 떼어내도 소용이 없다.

에린 공자 말대로 그냥 돌아갈까?

그렇지만 이런 모습으로 발견 되었다가는 단순히 꾸중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럼 에린 공자에게 납치당했었다고 말할까?

그럴듯한데?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거지꼴을 해가지고 미친 듯이 복도를 뛰었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 누구보다도 세뇨르 선생이 직접 보지 않았던가?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엉망이 된 모습과 에린 공자에게 납치당한 것 사이에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큰 개연성을 찾을 수 없었다.

혼나는 건 상관없다.

지금까지 숱하게 혼나봤다.

하루라도 혼나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혼나는 것에 베테랑이야!

왜 그런 것에 자부심을 표하는지 모르겠지만 비욘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두려운 건 로드리고를 찾으러 가는 행렬에 끼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나를 보내지 않으실 거다.

그렇다면 나는 좋든 싫든 이 인간과 같이 로드리고를 찾아야 한다.

절대로 싫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그랬어.

그랬더라면 에린은 성문을 통과하지 못했을 텐데...

자연히 낸시도 다시 성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거고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세뇨르 선생님 때문은 아닐까?

괜히 나를 쫓아와서 피곤하게 만든 거야.

전적으로 세뇨르 선생 잘못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절반쯤은 책임이 있어.

세뇨르만 아니었다면 나는 에린하고 낸시를 찾아냈으니까 굉장히 칭찬을 받아 마땅한 거잖아?

그래. 이건 세뇨르 선생님 잘못으로 해두자.

그게 편하니까.

물론 비욘느도 안다.

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가는 사람들이 잔뜩 보는 데서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얻어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은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다시 에린 공자를 상대할 기운이 나는 것이다.

“난 그냥 따라가겠어.”

비욘느는 멀리에 시선을 둔 채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에린은 기어코 마차를 멈추었다.

“뭐라고 했소?”

“그냥 같이 가주겠다고.”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비욘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저 인간은 정말 왜 저럴까?

여자를 배려할 줄 정말 모른단 말이야.

이럴 때는 그냥 알았다고 하고 넘어가면 되잖아?

조금 전 다퉜다고 꽁해가지고 이러는 걸까?

정말 그릇이 작네.

너무 작아.

내가 남자였으면 저런 사람하고는 절대로 친구 따위 되지 않을 텐데...

로드리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인간을 친구로 삼은 것일까?

그에게 오점이 있다면 그건 에린 공자와 친구가 된 것이 유일할 거야.

“...나 혼자서는 못 돌아가.”

“왜 그렇소?”

“너무 멀어. 길을 잃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내가 내려주려고 하는 마을은 바로 저 마을이오. 보이지 않소? 프레사가 눈으로 보이는 거리인데 멀다니...그냥 보고 걸으면 프레사일 거요.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

“...멀어.”

“멀지 않소.”

“그냥 멀어. 엄청 멀아. 아주 멀어. 절대로 멀어! 저기서 프레사까지 걸어서 갔다가는 지쳐서 죽어 버릴 거야. 어쩌면 개미들을 따라 개미굴에 들어가게 될지도 몰라. 그럼 길을 잃는 거지.”

“그럴 리가 없지 않소?! 절대로 죽지 않소. 무조건 죽지 않소.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란 말이오! 개미굴은 작아서 비욘느 양처럼 뚱뚱한 여자 아이는 절대로 들어 갈 수 없는 크기요. 그러니 염려할 것 없소.”

비욘느는 뚱뚱하다는 소리에 이를 악물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짚을 뭉쳐서 에린에게 던졌다.

그래봤자 금방 풀어져서 타격력이 제로에 가까웠지만 눈앞에 잔뜩 휘날리는 짚더미를 맞게 된 에린은 충분히 기분이 상했다.

“뭐하는 거요?!”

“암튼 멀어! 멀단 말이야! 나 지쳤어! 아까 엄청 뛰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프레사까지 걸어 가냔 말이야?! 조금은 더 나한테 상냥하게 대하란 말이야! 알았어?!”

“상냥?! 지금 상냥이라고 했소?!”

에린의 눈이 활활 불탔다.

세상을 살며 이렇게 기가 막히는 경우를 당한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더 상냥하게 대하냔 말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반말을 해대는데도 나는 꼬박꼬박 존대를 해주고 있다.

게다가 방금 전에 내게 짚을 던지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나는 참고 또 참고 있는데 지금 내 앞에서 상냥하게 대하라는 말을 한단 말이야?!

하지만 비욘느도 지지 않고 마주보며 소리쳤다.

“그래! 로드리고처럼 좀 더 상냥하게 대해! 대체 로드리고는 당신의 뭘 보고 친구로 삼은 건지 모르겠어! 아~! 이제 알았다. 그건 동정심이었을 거야.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못한 당신을 보고 그 선량한 마음에 동정심이 생겼겠지!”

누가 선량해?

낸시는 곁에서 숨죽이고 듣기만 하다가 도저히 그냥은 지나갈 수 없는 말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도련님이 선량한 편이면 지금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지 않을까?

대체 몇 번이나 가출하는 거야?

이번에는 나도 놓고 가고!

이제 다리는 됐으니까 그냥 집에 좀 가면 안 되는 걸까?

할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래도 높은 신분의 둘이 나누는 대화에 마음대로 끼어들 수는 없다.

낸시는 입술을 꾹꾹 깨물며 말을 아꼈다.

에린은 머릿속에서 ‘뚝!’하고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마부석을 손바닥으로 팍팍 두드리며 소리쳤다.

“닥쳐!!!!”

순간 비욘느의 표정이 굳고 말았다.

낸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에린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마부석을 두드려댔다.

마치 비욘느를 때리고 싶지만 대신 마부석을 두드려대는 것만 같았다.

비욘느도 느끼는 것이 있어서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뭔가 말했다가는 좋은 꼴을 보기 힘들었다.

낸시는 조금 전처럼 다시 그녀의 안에 남아있던 에린에 대한 왕자님의 환상이 쩍쩍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에린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빛으로 비욘느를 노려보며 말했다.

“닥치라고! 알아들어! 나도 알아! 그가 동정심을 가지고 나를 친구 삼았다는 것 정도는 안단 말이야!!! 알지만...크흑...알지만...흑...흑흑...그렇지만 어쩌란 말이야?! 으흐윽...흑흑...”

어느 순간부터 그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욘느와 낸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자기들보다 훨씬 몸집이 큰 사내가 울고 있는 것이다.

말은 없었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공유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난처해.

낸시는 주저하다가 에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두드려주었다.

“우..울지 마세요. 차...착하다...착하다...”

“흐으윽....으으윽....”

와락~!

에린은 낸시를 꼭 껴안으며 그 품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낸시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렇게까지 우는 남자를 차마 내칠 수는 없어서 여전히 어색한 손놀림으로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거...헤나로 아가씨 울 때 해주던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조금...징그러...

그녀는 도와달라는 시선을 비욘느에게 보냈다.

비욘느는 싫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욘느는 생각했다.

대체 갑자기 왜 우는 거야?!

완전 깬다!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말한 것뿐인데 그렇게까지 울건 없잖아?!

낸시는 계속해서 비욘느에게 시선을 보냈다.

비욘느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모든 일의 원흉이 자기 자신임을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결국 마지못해 조금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고 낸시를 흉내 내서 에린의 어깨를 살짝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차...착하다...”

그러나 용케 우는 와중에도 비욘느의 손길을 알아채고 에린은 어깨를 흔들어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순간 비욘느는 울컥하고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참아야했지만...그걸 스스로도 알았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다.

“너 진짜...진짜로~~~ 무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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