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1 여행길에서(1) =========================================================================
로드리고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엘가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렇게 누워있자니 노곤한 기분이 든다.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마치 자장가 소리 같다.
밤새 눈도 붙이지 않고 마차를 몰았으니 피곤한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알지도 못하는 아저씨하고 붙어서 대판 깨지기도 했다.
젠장...
뭐가 황혼의 기사냐?!
나는 제이미 경이나 크레이머 남작을 이겨 놓고 꽤나 기고만장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근방에서 가장 강한 자들로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그렇지만 실상은 아마도 별것 아니었던 모양이다.
원래 실력은 좀 포장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돌맹이를 쪼개면 바위를 쪼갰다고 하거나 뭐 그런 거 말이다.
물론 저 사내가 대륙 10강쯤 되는 강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대륙에 10명밖에 없는 존재를 길가다 만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냥 평범한 용병 정도겠지.
조금 강한 편에 들지도 모른다.
자기 입으로 마르슈 지방에 가려면 실력 좋은 용병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럼 조금 강한 용병쯤으로 생각하자.
그런데 어찌되었든 나는 졌다.
한 대 때려보지도 못하고 완전히 패한 것이다.
놈의 말이 맞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엘가를 지켜줄 힘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젠장...
...젠장...
로드리고는 꿈틀거리며 엘가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자연히 엘가의 가슴은 출렁거렸다.
그녀는 딱히 로드리고를 탓하지 않았다.
그걸 곁에서 맴돌며 지켜보던 호프레는 자기도 모르게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입가에 바보 웃음이 짓게 된다.
엘가는 용케 그걸 알아채고 곁에 두었던 짱돌을 집어 들었다.
호프레는 서둘러 표정을 살피고는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로드리고는 그런 일련의 과정은 조금도 몰랐다.
다만 그는 보다 실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이런 생각을 알게 되면 헛웃음을 짓겠지만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카드가 있다.
물론, 그 고생은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꺼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겐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얼굴도...젠장...집안도...젠장...
낸시도...나쁜 년...크흑...
다시 로드리고가 엘가의 품에 꼬옥 안겨 든다.
호프레는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출렁이는 엘가의 가슴을 훔쳐보았다.
좋구나...
아...좋아...
내가 저기에 안겨 있었더라면...
자연히 그의 입은 다시 바보웃음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안 돼!
내 평가를 더욱 낮추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보고 싶어....
호프레는 이를 악물며 굳건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마르슈 지방에 갈 수는 없어.
나는 내 실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용병에게도 당하면 소용없는 짓이지.
일단은 어딘가에서 실력을 길러야 해.
그래도 한달 정도면 되지 않을까?
남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였지만 로드리고는 한 달간 고생할 생각으로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도피네 지방으로 갈까?
거기는 안전할 것 아니야?
몬스터 같은 것도 없을 테고.
엘가도 고생할 필요 없고.
하지만 어차피 수련은 해야 하는 거야.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될 수 없어.
꺼려진다고 언제까지 미룰 수만은 없으니까.
솔직히 고생하는 것 보다 더욱 꺼려지는 건 황혼의 기사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를 꿰뚫듯 쳐다보며 이것저것 훈수를 두어 댈 것이 자명하다.
그럼 그냥 그만 둘까?
하지만 그는 호프레를 생각했다.
그 무뢰한!
금수보다 못한 놈이다.
개도 밥 주는 주인은 물지 않는데, 엘가가 먹을 것도 주고 했는데 나를 물었다.
자기가 직접 준 것은 아니지만 재료는 자신이 준비한 것이다.
그러니까 직접 준 거나 다름없다.
놈은 엘가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나를 유린했다.
한 대 정도는 맞아줘도 되잖아?
그런데 두드려패기만 하다니...
실력을 보려면 실력만 보면 되지 왜 때리냐고!?
분이 올라 왔다.
그래. 고생하는 것도 싫고, 황혼의 기사에게 잔소리 듣는 것도 싫지만 그래도...놈은 이겨야 겠어.
엘가가 보는 앞에서 놈을 때려 주고 만다!
결국 그는 다시 루트를 통해 검의 신전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엘가의 품에서 고개를 들자 상냥한 엘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손에는 짱돌을 들고 있었지만 어쨌든 상냥한 표정이다.
“괜찮아? 자지 않고?”
“괜찮아요. 이렇게 길가에 마냥 있을 수는 없죠. 그만 가요.”
“하지만...”
엘가가 한쪽으로 시선을 준다.
호프레는 여전히 휘파람을 불며 천천히 주변을 돌았다.
저 인간은 왜 가지도 않고 저러는 걸까?
설마 돈 달라는 건가?
딱 봐도 가난해 보이는 나하고 엘가한테 뜯어낼 생각인 거야?!
그래도 저 정도 실력이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만 한 거 아니야?
로드리고는 품을 뒤졌다.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던 1골드가 손에 잡혔다.
이건 내어 줄 수 없다.
엘가와 나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놈을 이겨서 쫓아 버릴 자신도 없다.
이미 실력을 알았는데 괜히 붙어서 또 얻어맞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일단 대화로 해결해 보자.
사정을 설명하면 그냥 가줄지도 모르지.
로드리고는 쭈뼛거리며 호프레에게 다가갔다.
엘가가 로드리고의 손을 잡고는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자 결국 로드리고의 손을 놓아 주었다.
호프레는 드디어 다시 꼬마 놈과 대화할 수 있게 되자 조금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반가운 마음에 호프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냐?”
뭐야? 두드려 패고 나서 걱정해 주는 말투는...
하지만 패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럭저럭이요.”
“다행이군. 뭐, 내가 적당히 봐주면서 했으니까 당연하겠지만. 하하하하!”
로드리고는 이마에 삐죽 힘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러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온다.
“하...하하하...가..감사합니다. 사정을 봐주셔서 말이죠. 헤..헤헤...”
“그렇지! 역시 잘 알고 있군! 내가 봐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원체 강해야 말이지. 음하하하하하!”
로드리고는 반대편 이마에서도 힘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새끼...반드시 언젠가는 갚아준다.
“그럼 저희는 이만...갈 길이 바빠서요.”
“응? 이렇게 그냥 간다고?”
호프레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로드리고는 마음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젠장...돈을 뜯을 셈이군.
“여비가 빠듯해서 서둘러야 합니다. 헤헤...”
“그도 그렇겠군. 하지만 나 때문에 다친 자네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네. 성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겠나?”
호프레는 자기가 성의를 표하겠다는 뜻이었으나 로드리고 입장에서는 반드시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뭐냐?! 꼬마 때리느라 힘썼으니까 기어코 받겠다는 거냐?!
“보내 주십시오!”
“안되네! 내 이름을 걸고 나는 이런 경우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지. 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안 될 말이네.”
로드리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정말...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되네!”
후우...나쁜 놈이네.
그럼 좋다.
네가 원하는 조건을 일단 말해봐라.
“그럼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습니까?”
“흐음...내가 마차를 몰아주겠네. 한동안 동행하도록 하지.”
“도...동행...이요?”
로드리고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 새끼...엘가와 나를 팔아버릴 생각인거냐?!
우리가 가진 돈이 얼마 안 될 것 같으니까?
“왜 그러나? 설마 싫은 건가?”
호프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다.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아니요. 다...당연히 좋죠. 하지만 원래 가시던 방향과 완전히 반대인데...”
“아! 괜찮네. 더 좋은 걸 찾았으니까.”
인신매매가 원래 돈이 되긴 하지. 젠장...
“그...그렇군요. 헤...헤헤...”
로드리고는 등허리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서둘러 실력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와는 반대로 호프레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자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동행이 되면 계속해서 내 실력을 보여주고 놈이 먼저 내게 부탁하게 만드는 거다.
내 위치에서 어린놈에게 제자가 되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마르슈 지방에 일이 있다면 그것도 이참에 보고 가게 해주는 편이 나을 거야.
수련하다 괜히 멀리 떠나야 한다고 말하면 골치 아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