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여행길에서(1) =========================================================================
엘가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이랑 동행한다고?! 나는 싫어. 내키질 않는 걸...”
놈이 엘가와 자신을 팔려고 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음에도 그녀의 반응은 명백한 거부였다.
호프레는 ‘흠흠!’거리며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로드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삐끗한 모양에요. 마부석에 앉을 수 있을지 어떨지...”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자 엘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어디 보여줘 봐.”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한창 나이의 여자에게 자기 벗은 몸을 보여주기는 꺼려졌다.
게다가 심각하게 아프지도 않다.
보여줄 것 자체가 없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좀 쉬면 어떻게든 되겠죠. 제가 괜찮아 질 때까지는 저 사람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요.”
엘가는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은 너를 다치게 한 사람이란 말이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그게 일부로가 아니면 대체 어떤 게 일부로야? 그냥 가자. 내가 마차를 몰아볼게. 응? 배우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
로드리고는 슬쩍 시선을 돌려 호프레를 쳐다보았다.
그가 눈을 부라리며 로드리고를 노려본다.
로드리고는 호프레가 다시 발광할지도 몰라 겁이 났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지금은 참혹한 결과를 몸소 깨달았다.
로드리고는 애써 핑계거리를 생각해내 그녀를 말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몰게 되면 바퀴가 빠질 지도 몰라요. 그러면 정말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니까...그리고 심하게 흔들리면 제 통증도 더 심해질지 모르고...미안해요. 정말...”
엘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싸우지 말란 말이야. 나는...그런 거 싫으니까. 지면 좀 어때? 그냥...안전한 것이 더 좋아. 사정이 그렇게 됐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키질 않아. 저 사람...날 이상하게 쳐다봤다구. 응큼한 시선이었어. 난...그런 건 잘 알아...”
엘가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로드리고는 서둘러 실력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놈이 혹시 엘가의 몸을 노리면 방법이 없었다.
호프레가 알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로드리고는 조급함을 느꼈다.
그렇게 엘가와 함께 짐칸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짐 속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었다.
만져지는 것이 있다.
루트...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걸 힘주어 쥐었다.
밤을 샜기 때문에 피곤함은 충분했다.
덜그럭 거리는 마차 위에서도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앞에는 황혼의 기사가 빙그레 웃으며 서있었다.
“로드리고군, 정말 오랜만일세.”
“그...그렇군요.”
황혼의 기사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가 난 부분이 느껴진다.
자연히 찔리는 구석이 있는 로드리고는 말을 더듬었다.
“여긴 무슨 일인가? 갑자기 내가 필요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군?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곳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
로드리고는 얼굴을 붉히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내리 깔았을 뿐이다.
하지만 황혼의 기사는 이내 로드리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주눅들 것 없네. 섭섭하기는 하지만 딱히 책망하는 건 아니야. 그저 자네가 좀 더 자주 찾아와 주길 바랄 뿐이지. 여긴...보다시피 나 혼자니까.”
“죄송합니다. 이래저래 바쁘다보니...”
“됐네. 됐어. 그보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실은...”
로드리고는 제이미 경을 이겨 기고만장해 졌던 자신과 조금 전 나그네에게 깨진 사실을 말해 주었다.
창피했지만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한 것도 이야기했다.
황혼의 기사는 로드리고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서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봐! 로드리고! 자네는 무적이 아니야! 아직 갈 길이 멀단 말일세. 간신히 여행할 수준에 도달했을 뿐인데 그렇게 평정을 잃어서는 안 돼지. 그 사내에게 크게 당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군. 자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또 혼나 남게 된다네. 좀 더 안전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돼.”
“예. 저도 이번에 깨달은 바가 정말 큽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로드리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인정하자 황혼의 기사는 더 이상 로드리고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내가 꽤 실력은 있는 모양이군. 자네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니...적어도 경험 많은 용병 정도는 될 거야.”
“그보단 더 강하지 않을 까요?”
이왕 질 거라면 좀 더 강한 자에게 지고 싶다는 생각에 딴지를 걸어본다.
황혼의 기사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 뭐, 나야 요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보다시피 밖의 사정은 알 도리가 없으니까. 내가 살던 시대의 수준에 맞춰서 생각하는 수밖에 없네.”
로드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 자를 이겨야 합니다.”
황혼의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이유가 뭔가? 아직 자네는 배우는 중이라 졌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서둘 필요는 없네.”
말하기 창피한지 로드리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가 절 팔려고 합니다. 노예로 말이죠.”
“...뭐라고?!!!!!!”
순간 황혼의 기사 눈에서 분노가 넘실거린다.
“그런 명예를 모르는 자를 보았나?! 승부는 신성한 것인데 졌다고 그런 짓을...요즘은 승자의 아량을 찾아보기 힘든 척박한 세상이 된 모양이군. 알았네. 자세를 잡게!”
“벌써요?!”
“어서!!!”
“아...예!”
지난날의 지옥이 생각나는지 로드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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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는 계속 잠만 자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간밤에 밤을 새서 이런 것인지 아니면 마차를 모는 저 사내와 다퉈서 어딘가 크게 다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런 엘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는 서로 간에 더 이상 얼굴 붉힐 일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호프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원래 어디 출신이지?”
“......”
“아가씨?”
“......”
“과묵한 편인가 보네. 하..하하하!”
“......”
“나..나는 말이야 제국 출신이라서...거 왜...제국 알지? 응?”
“......”
“저..저쪽에 큰 나라...하나...있는데...”
호프레는 한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뒤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엘가를 보고는 다시 서둘러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흠흠!”
“......”
한편 프레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비욘느가 안 보인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 시점에서 정신이 없어 죽겠는데 세뇨르 선생으로부터 청천벽력의 소식을 접한 브라우닝 자작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반문했다.
“아가씨께서 그...그게 어쨌든 민망한 옷차림으로 뛰어 가시는 걸 보고는 제가 쫓아갔는데....그 후로는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어디서 놀고 있겠지! 자네는 지금 이 많은 서류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하..하지만 아가씨께서...”
“비욘느가 몰래 놀러 나가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야! 그걸 말리라고 자네에게 몇 번이나 지시했었지. 그런데 지금 자네가 내게 와서 비욘느가 사라졌다고 보고하면 어쩌자는 건가?! 응?! 말해보게!”
“그..그게...좀처럼 말을 듣지 않으셔서...”
“그러니까 자네가 있는 거 아닌가?! 왜 나를 가르칠 때처럼 하지 못하는 거야?!”
“...자작님은 평범한 아이였습니다만...아가씨는...”
“평범한 아이로 만들란 말이야! 정 걱정되면 병사 몇 명 차출해서 찾아보던가!? 제이미 경에게 말하면 알아서 해줄 것 아닌가?!”
세뇨르 선생은 이례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불만어린 표정을 지었다.
“제이미 경에겐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그 노인네는...”
하지만 자작은 손을 내저으며 세뇨르 선생의 말을 막았다.
“됐네! 바빠 죽겠는데 자네와 제이미 경 사이의 하소연까지 듣고 있을 생각은 없어! 아무튼 좀 있으면 나타나겠지. 바쁘니 그만 나가 보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자작은 세뇨르 선생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프레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병사들은 밤새 뛰어 다녔고, 집집마다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비욘느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