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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63화 (163/200)

00163  여행길에서(1)  =========================================================================

해가 기울어 갔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 곧 다가올 어둠을 경고한다.

바람도 불었다.

서늘한 바람이었다.

머릿결을 한차례 나부끼게 만들곤 저만치로 물러가 버린다.

몸을 떨고 옷깃을 여민다.

말은 느리고 꾸준한 걸음을 옮긴다.

대체로 평탄하지만 그래도 마차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조금 전 창피한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에린은 기분이 좋았다.

지금 보는 이 풍경이 그에게 자유라는 걸 만끽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꾸지람에서 벗어났다.

가문의 무게에서도 벗어났다.

같이 훈련하는 기사들의 시선에서도 벗어났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마차 짐칸에 몸을 싣고 있는 나이 어린 소녀 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도 못해서야 사내라고 할까?

하지만 그게 그의 생각대로 그렇게 쉬울까?

아마도 우리는 차차 그 진실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서두르지 말자.

에린은 마차를 어디에 세워야 좋을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여행이 처음은 아니지만 스스로 그런 걸 결정해야 하는 입장에 서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고삐를 그가 쥐고 있다.

소녀들은 짐칸에서 조용히 그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다.

작고 볼품없는 일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린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설레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불안 따위는 없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이런 걸 잘하는 사람일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잘 할 수 있겠지.

적당한 자리를 찾자.

일행이라 해봐야 고작 3명이다.

작은 공터만 있어도 충분할 거야.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뒤편의 소녀들은 어쩌란 말인가?

여행이 익숙한 것처럼 보여야 해.

그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날이 곧 어두워 질 것 같은데 저만치에 마차를 세우고 저녁을 드는 게 좋겠소.”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낸시가 대답했다.

하지만 비욘느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을로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하지만 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마을은 안 되오. 금세 자작님께 발견되고 말 테니까.”

“그럼 밖에서 자겠다는 거야?”

비욘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따져 묻는다.

“...싫으면 떠나도 좋소.”

명백히 떠났으면 좋겠다는 투였지만 비욘느도 오기가 발동했는지 꽥하고 소리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떠나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떠날 거야! 알아?!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한다고!”

에린은 살짝 미간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예의를 지키시오.”

“흥! 울보가...”

에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이!”

“뭐?!”

비욘느는 절대로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노려본다.

에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됐소! 당신 같은 사람은 상대하지 않겠소. 내 가치가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군.”

“정말 웃겨! 그렇게 말해봤자 아까 운거 때문에 네 가치는 더 떨어질 것도 없거든!?”

에린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었지만 간신히 주먹을 쥐지는 않았다.

다만 비욘느의 말은 듣지 못했다는 듯 낸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짐을 내리는 걸 내가 도와주겠소. 아니, 레이디가 내리는 것부터 도와주는 편이 더 좋을까?”

싱긋 웃으며 상큼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낸시도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자기에게 주의가 집중되는 것은 별로 반길 수 없었다.

“제...제가 알아서 내릴 수 있어요. 타기도 했는걸요.”

“그래도 지금은 도울 수 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그럼 짐은 내가 내리겠소.”

옆에서 둘이 알콩달콩하는 모습을 보던 비욘느는 뭔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절대로 에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한테는 막 대하면서 낸시에게는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왠지 보고 있으면 불쾌했다.

물론 그녀도 에린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은 아니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쾌하다.

그것도 몹시 불쾌하다.

자연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어딘가 뾰족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그럼 짐을 여자인 우리보고 내리라고 하려 했단 말이야?! 정말 어이없어.”

“...비욘느양! 나는 그냥 짐을 내리겠다고 했을 뿐이오!”

무시하려 해도 어느덧 그의 분노 게이지가 가득 차버렸는지 에린은 비욘느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에린의 그런 태도에는 비욘느도 더 이상 이죽거리듯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콧방귀를 한번쯤은 쳐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명백히 졌다는 인상을 심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흥!”

아무튼 귀족 둘과 하녀 출신 계집 하나가 하룻밤 야영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히 귀족 둘은 멀뚱히 서있었다.

에린은 뭔가 해보고 싶었지만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

비욘느는 자기가 뭔가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낸시는 차마 자기와는 신분 자체가 다른 둘에게 뭔가 시킬 수가 없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래도 이전 여행보다는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이번에는 목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로드리고가 야영준비를 대부분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집도 떠나 왔고, 로드리고는 돌아갈 생각을 안했고, 주인님과 마님은 분명 걱정하실 테고, 다시 돌아가면 어딘지 알지 못하는 마을에 가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그리고 다리를 저는 입장에서 남들만큼 잘 할 수 있을지 염려도 되었다.

이번 여행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대체 어디가서 도련님을 찾아 온단 말인가?

아무런 단서도 없다.

그래도 일단은 나뭇가지를 줍는다.

그녀가 하는 모양새를 보곤 멀뚱히 서있던 에린이 그녀 곁으로 다가가 같이 나뭇가지를 주웠다.

하지만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고 에린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여행하는 입장에서 레이디에게 모든 일을 맡길 수는 없소! 나도 줍도록 해주시오!”

낸시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나뭇가지는 안 돼요. 마르지 않아서 잘 타지 않는 걸요.”

곁에서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비욘느가 대놓고 비웃었다.

에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색하게 웃었다.

그걸 보곤 비욘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울지 않네. 착하다...착하다...”

에린은 한차례 비욘느를 노려보곤 다시 나뭇가지를 주우며 낸시에게 물었다.

“그럼 이런 걸 말하는 거요?”

“그래요. 이런 걸 주워야 해요. 나중에 제대로 불이 붙으면 좀 더 물기를 머금은 것들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불이 제대로 붙은 후에는 좀 더 굵은 걸 태우는 편이 나아요. 자잘한 나뭇가지보단...”

“그렇군. 낸시 양은 아는 것도 많소.”

“...그...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이건 도련님이 저번에 가르쳐 준 거니까...”

“로드리고가 말이요?”

에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연히 비욘느도 좀 더 귀를 기울인다.

“예. 예전에 상행을 나갔을 때, 주인님이 가르쳐 주신 모양이에요.”

“상행?”

에린은 다시 반문한다.

왜 로드리고가 상행을 나가야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검을 수련해야지 상행 따위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에린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야, 밀을 팔아야 하니까...다른 곡물도 마찬가지고...주인님이랑 같이 갈 때가 종종 있어요.”

“로드리고의 아버지는 상인이오?”

“주인님이요? 글쎄요. 하지만 평소에는 농사를 지으시니까...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그보다는 어서 나뭇가지를 주워야 해요. 이렇게 말할 시간은 없는 걸요. 금방 날이 저물고 말 거예요. 그 전에 불을 붙여야 수월할 거예요. 저녁으로 먹을 것도 만들어야 하고.”

“아! 그렇군. 그럼 로드리고의 이야기는 앞으로 찬찬히 해주시오. 기대하겠소.”

“그렇지만...별로 드릴 말씀도 없는 걸요.”

“하하! 그냥 그가 평소에 자주 하던 이야기를 해주면 되오.”

순간 낸시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가슴’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둘에게 할 수는 없다.

낸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나뭇가지를 분주히 주웠다.

에린도 열심히 나뭇가지를 줍는다.

그리고 곁에서 비욘느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가끔씩 팔짱을 풀고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곤 했다.

“저기도 있네! 그리고 저기도! 저것도 줍도록 해! 그래! 거기! 아! 여기도 있다!”

낸시는 묵묵히 그녀의 지시에 따라 절뚝이며 나뭇가지를 주웠지만 에린은 슬슬 이마에 혈관마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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