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5 여행길에서(1) =========================================================================
에린은 밤새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땔감이 타는 소리가 간간히 울렸다.
밤은 갈수록 어두워 갔다.
달이 떴어도 어스름한 빛만 비춰줄 뿐이었다.
멀리서 짐승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그럴 때면 에린은 곁에 둔 검을 집어 들고 언제든 뽑을 수 있는 채비를 하곤 했다.
항상 부담으로만 다가왔던 검이 지금은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소녀들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부럽게 쳐다보기도 했다.
대체로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간혹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소리도 들렸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저렇게 세상모르고 잘 수 있다니...
나도 졸린데...
낸시 양은 로드리고와 이미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침번을 서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한 걸 보면 그가 낸시 양에게 불침번을 세우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로드리고라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여행으로 끝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계속해서 밤새 불침번을 설 수 있었던 것일까?
의문이 든다.
설마 그는 경지에 들어 며칠 밤을 자지 않고, 며칠 먹지 않아도 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에린은 어린애 같은 망상을 하면서도 그것이 진실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그라면 정말 그럴지도 몰라.
아니면...그게 아니라면 로드리고가 밤을 새고 아침이면 낸시 양이 마차를 몰았을 지도 몰라.
아마 그게 더 있음직한 일이겠지.
여자라고 마차를 몰지 못하리란 법도 없고.
실제로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영지를 시찰할 때, 아낙이 마차를 모는 걸 본 적이 있다.
만약 정말로 낸시 양이 마차를 몰 수 있다면 내일은 그녀가 내 대신 마차를 몰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도무지 이렇게 꼬박 밤을 새고 내일 하루 종일 마차를 몰 자신은 없다.
엄두가 나지 않는 달까?
그래도 힘을 내자.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내일은 저 보기 싫은 비욘느를 버려두고 갈 수 있어.
내일 눈을 떴을 때, 공터에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만 남겨진다면 조금은 스스로의 잘못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야.
따지고 보면 이건 전부 비욘느를 위한 것이지 않은가?
당장은 홀로 남겨져 나를 원망할지 모르지만 훗날에는 내게 고마움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다.
그래. 나는 그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녀를 버리고 가려는 것이 아니야.
뜻하지 않게 그녀를 여행에 데려오게 되긴 했지만 이대로 가면 브라우닝 자작은 걱정으로 제대로 정무도 보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을 테니까.
그에게 비욘느 양을 돌려주는 것이 옳지.
비록 그가 로드리고와 내게 신의를 가지고 올바르게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갚는 것은 올바르다 할 수 없지.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로드리고의 친구야.
그렇다면 그에 걸 맞는 사내가 되어야 맞는 거야.
불이 심하게 일렁거린다.
하지만 곧 형태를 잡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도 저 불과 같이 잠시 일렁거린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내가 하려는 바를 바꿀 필요는 없겠어.
다만 그녀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서는 안 돼.
그건 부끄러운 짓이니까.
진실로 그녀가 잘 되고, 자작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자.
물론 부가적으로 얻어지는 내 편의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무엇보다 이대로 낸시 양과 비욘느를 어울리게 둘 수도 없고.
나는...아무튼 나는...내가 물을 뜨러 간 사이 일어났던 그 일은 전부 잊었으니까 내가 하려는 이 일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어.
큼지막한 땔감을 몇 개 더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찬바람을 느끼며 몸을 잠시 움츠렸다.
하지만 불 곁이라 이내 그 활활 타오르는 열기에 노곤함을 느낀다.
여전히 깊은 어둠이 사위에 가득하다.
에린은 차츰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자지 않아.
잘 수 없다.
하지만...졸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눈이 뻑뻑하다.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참아 보지만 졸음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어느 순간 불가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에린은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비욘느는 자기보다 먼저 일어나 낸시가 만드는 음식을 군침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에린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아~~! 젠장!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화를 삭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욘느가 말했다.
“하여간 늦잠이나 자고...정말...”
아직 제대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에린은 절제하지 못하고 대응한다.
“나는 불침번을 섰단 말이야!”
“뭐?! 내가 본건 자는 모습뿐이었는데? 그것도 늦잠이잖아?”
“정말 섰는데...불침번...서다가...”
“잤다는 거지?”
“......”
둘의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낸시가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와서 좀 드세요.”
에린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래도 출출함을 느껴 고개를 끄덕였다.
낸시에게 그릇을 건네받으며 에린이 말했다.
“고맙소. 그보다...저기 불이 계속 타고 있지 않았소? 그게 내가 어제 불침번을 서면서 꺼지지 않게 계속해서 불을 지폈는데...”
“아...예. 맞아요. 불씨가 남아있었어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계속 타고 있지 않았느냔 말이오!”
“그..그랬던 것 같네요.”
낸시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봤지! 내가 불침번 정말 섰단 말이야!”
에린은 시선을 돌려 비욘느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비욘느는 열심히 그릇을 핥아 먹다가 갑자기 에린이 소리를 치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누가 뭐래? 아! 정말! 그냥 좀 먹어! 진짜 쫌스럽네!”
“......”
에린도 비욘느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가 소인배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하루 더 비욘느와 같이 여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싫다.
전부 비욘느 저 계집애를 위해 하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려 했지만 이제는 명확해 졌어.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않겠어.
나는 비욘느 저 꼬마 계집애가 정말 싫어.
나는 왜 밤을 새지 못했단 말인가?
이로써 하루의 지옥과 같은 시간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는데...
이젠 내 명예를 지키고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저 계집애를 버리는 수밖에 없어.
내 페이스를 다시 되찾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만 보이게 될 것이 뻔해.
낸시 양도 내게 실망했을지 모르겠군.
아무리 잠이 제대로 깨지 못했다고 해도 왜 굳이 믿지 않는 저 계집애를 설득하려 무리했단 말인가?
슬프구나.
설마 나중에 로드리고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거나 하진 않겠지?
에린이 그릇을 든 채 입에 대지 않자 옆에서 자기 것을 전부 먹고 침을 흘리고 있던 비욘느가 묻는다.
“그거 안 먹을 거야?”
에린은 눈을 한 차례 부라리며 말했다.
“먹을 거요!”
“칫....”
“남의 것을 탐내는 건 결코 명예로운...아니 됐소.”
한차례 비욘느를 책망하려던 에린은 이내 말을 줄였다.
괜히 말했다가 또 울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비욘느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로드리고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잖아?”
곁에서 낸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에린을 쳐다본다.
에린은 입에 넣은 걸 목으로 넘긴 후에 천천히 말했다.
“일단 수도로 갈 거요. 거기는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소식을 얻기도 한결 수월하겠지.”
“수도?”
비욘느의 눈이 반짝인다.
그리고 그건 낸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로드리고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방에서 나고 자란 소녀에게 수도는 누가 뭐라 해도 동경어린 땅이었기 때문이다.
낸시가 에린에게 물었다.
“공자님은 수도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한 번 가본 적이 있소. 외할아버지는 만나러 갔었다오.”
비욘느도 입을 열었다.
“나는 가본적은 없지만 오빠가 거기서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 그래서 오빠가 영지로 돌아올 때마다 이것저것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편이야. 뭐든 물어봐도 좋아.”
아무래도 에린이 가본 적이 있는데 자기는 가본 적이 없자 괜히 허세를 떠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낸시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릇을 싹싹 비우며 에린이 낸시에게 물었다.
“그런데 낸시 양, 혹시나 해서 그런데...마차를 몰 줄 아시오?”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몰라요. 마차는 몰아본 적이 없는 걸요. 왜 그러세요?”
“아니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시오. 하..하하...”
그렇게 그날도 에린은 마차를 몰았다.